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전자에 부품 장기공급 계약 체결을 강요하는 등 '갑질' 혐의를 받는 미국 스마트폰 부품 공급사 브로드컴의 자진시정안(동의의결안)을 13일 기각했다. 브로드컴이 낸 시정 방안이 삼성전자의 피해 회복에 미흡하다는 판단에서다. 공정위가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한 뒤 동의의결안 내용을 문제 삼아 기각한 것은 처음이다.
동의의결 제도는 법 위반 혐의를 받는 사업자가 스스로 원상회복, 소비자 또는 거래 상대방 피해구제 등 시정 방안을 제안하면 위법 여부를 확정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하게 종결하는 제도다.
브로드컴은 구매 주문 승인 중단 등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해 삼성전자가 와이파이·블루투스 등 스마트폰 부품을 3년간 연간 7억6000만달러 이상 자사로부터 구매하는 장기계약(LTA)을 맺도록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해 1월 조사를 마치고 심사보고서를 상정했다. 이어 지난해 7월 브로드컴의 신청에 따라 같은 해 8월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했다. 이후 브로드컴이 공정위 심사관과 협의해 최종 동의의결안을 마련했으나 7일 전원회의에서 위원들이 이를 기각했다.
동의의결안에는 반도체·정보기술(IT) 분야 중소 사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200억원 규모 상생 기금을 조성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지만,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기존 구매 제품에 대해 3년간 품질보증·기술지원을 제공하고 삼성전자의 부품 주문·기술 지원 요청에 유사한 상황의 거래 상대방 수준으로 응한다는 내용만 포함됐다.
공정위는 "동의의결안에 담긴 삼성전자에 대한 품질보증·기술지원 확대 등은 그 내용·정도에 있어 피해보상으로 적절하지 않고, 유일한 거래 상대방인 삼성전자도 시정 방안에 대해 수긍하고 있지 않다"며 "동의의결 인용 요건인 거래 질서 회복이나 다른 사업자 보호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기각했다"고 밝혔다.
공정위 위원들은 심의 과정에서 기술 지원·품질 보증을 유상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고, 적용 부품 범위와 지원 수준을 확대하는 등 삼성전자에 대한 피해보상을 보강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브로드컴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삼성전자 측 대리인은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브로드컴이 강요한 LTA로 인해 삼성전자가 2억8754만달러(약 3653억원)의 추가 비용과 3876만달러(492억원) 상당의 과잉 재고를 떠안았다"며, "동의의결안에 금전 피해에 대한 구체적 구제 방안이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신고한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 관계자도 참고인으로 참석해 "브로드컴이 삼성전자를 위협해 퀄컴 부품 사용을 막고 경쟁을 제한했다며 동의의결안을 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다.
브로드컴 측 대리인은 동의의결안 심의 과정에서 "삼성과의 장기계약은 상호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이며, 브로드컴이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동의의결 무산에 따라 브로드컴의 '갑질' 사건은 심의를 거쳐 제재 여부를 결정하는 통상적인 사건 처리 절차를 밟게 됐다. 공정위는 조속히 전원회의를 열어 브로드컴의 법 위반 여부와 제재 수준 등을 결정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