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18:55 (수)
◇ 김수종의 취재여록 ⑲ 한라산 탐닉했던 저널리스트
◇ 김수종의 취재여록 ⑲ 한라산 탐닉했던 저널리스트
  • 김수종 이코노텔링 편집고문(전 한국일보 주필)
  • diamond1516@hanmail.net
  • 승인 2023.04.27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라산 100여차례 오르고 서울 ~ 제주 180차례 왕복 하는등 '인생 황혼기'에 '제주 동행'
제주 대학생들에게 고전 가르치면서 논조 다른 두가지 신문의 사설비교 강의에도 온 힘
HRA(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창립 멤버 참여…추사 김정희 살던 곳 등 제주유적지 섭렵
제주역사 탐방서 '제주사용설명서'저술… 원희룡 제주도지사로부터 '명예 도민증' 받아
2022년 10월 제주에서 열린 김훈작가 초청 북콘서트 광경. 왼쪽부터 고 문창재씨, 김훈작가, 필자, 김경희 전 유니세프한국위원회사무처장. 사진=김수종 편집고문.

아파트 창문으로 날아든 봄 햇살을 쬐고 있는데 스마트폰 벨이 울렸습니다. 모니터에 뜬 이름이 '문창재'였습니다. 폐암과 투병 중이란 걸 알고 있어서 안부가 궁금하던 터라 다짜고짜 "성님(평소 부르는 호칭), 어디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저~, 아들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의 휴대폰을 통해 그 아들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갔구나"하고. 아들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전 돌아가셨습니다."

오십 년 지기 언론인 문창재 선배를 4월 8일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공허함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화사한 튤립꽃을 보아도 빨간 홍매화를 보아도 봄이 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올해 4월은 나에게 잔인한 달입니다.

'언론인 문창재'는 194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고,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1972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한 이래 타계하기 한 달 전까지 50년 넘어 글을 써온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1970년대 신문기자들 사이에 소문난 사건기자였으며 1990년 대 도쿄특파원이 되어 수많은 발굴 기사를 취재하고 써서 필명을 날렸습니다.

이 컬럼에서는 한국일보를 퇴임한 후 고인과 필자가 교류하면서 가까이서 보았던 문창재 선배의 활약을 회상하며 추모하고자 합니다.

한국일보 2년 선배인 '언론인 문창재'는 2003년 논설실장 직에서 퇴임했습니다. 그가 퇴임 보름을 앞두고 일본으로 마지막 취재여행을 다녀와서 기사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취재여행은 자비로 충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동료 논설위원으로서 그게 인상 깊어서 한국일보 '지평선' 난에 '글 여행 32년' 이란 제목을 붙여 흔치 않은 굿바이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내일신문 논설고문으로 글쓰는 일을 계속해서 타계하기까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5,6년 같이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나도 퇴직하고 난 후 그의 소개로 내일신문에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소위 제2인생의 한 발을 그와 같은 차에 디뎠던 셈입니다. 한국일보 30년 내일신문 17년 해서 거의 반세기를 '글 동무'로 함께 한 것이니 참 길고 기묘한 인연이었습니다.

 나와 문창재 선배, 김훈 작가 이렇게 셋은 성산 일출봉에 같이 올랐다. 사진=김수종 편집고문.

그는 기자의 직분에서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풍채나 원만한 인간관계로 볼 때 한눈 팔 만도 했지만 기자로 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것을 큰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끔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005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윌리엄 사파이어가 "결코 은퇴하지 말라"는 마지막 칼럼을 써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 칼럼에 딱 맞는 사람이 고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문창재 언론인상'(言論人象)은 '현장과 사실'을 쫓고 자신의 이해와 타협하지 않는 엄격한 기자상입니다.

그를 언론인으로만 생각하는 데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삶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제주도 젊은 청년들과의 깊은 교류였습니다.

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도 청년 약 30명이 병원 빈소로 달려왔습니다. 너댓 명은 주말 예약하기 어려운 비행기표를 구해서 빈소를 찾아왔고 한 여성은 밤을 새고 새벽 장례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고인으로부터 고전을 읽는 맛을 배웠고 틈나면 한라산이나 올레길을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던 제자들입니다.

그가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귀포가 고향인 나와 함께 2007년 제주도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만든 HRA(휴먼르네상스아카데미)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고전책 읽기를 지도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HRA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아래서 기조실장으로 일했던 나의 한국일보 동기 서재경씨가 제의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대학생들에게 성품과 현장 능력을 갖춘 직장인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제주도 민간인들의 지원을 받아 만든 1년 코스의 빡센 민간 교육훈련 과정입니다. 연간 40주 매주 토요일 8시간 수업을 하는 데 동서양 고전 100권을 공부하고 기업 실무 케이스스터디로 이뤄진 커리큘럼입니다.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기업실무 교수진은 서재경씨와 대우전자 중국법인장을 했던 조기대 씨 등 퇴직한 대우 임원 2명이 매주 번갈아가면서 제주를 왕래했고, 고전 교수진은 문창재(내일신문 고문) 이유식(전 뉴스1사장) 이계성(전 국회의장 정무수석)씨 등 나의 한국일보 선후배들이 한 달에 한 번 제주에 내려갔습니다. HRA는 나중에 제주대학교와 제주도청이 지원에 나서면서 민관학(民官學)의 협력하는 청년프로그램 모델이 되었고 지금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인은 이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등 중국고전과 한국의 시, 그리고 '설국' 등 일본 문학의 맛을 학생들과 함께 토론했습니다. 오래 논설을 썼던 그는 특히 학생들에게 한 가지 이슈에 대해 논조가 전혀 다른 두 신문의 사설을 읽고 비교 평가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정파적 관점이 아니라 글이 논리적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며 글쓰기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대학생들은 종이 신문을 읽지 않습니다. 고인은 이를 한탄하며 신문을 두 가지 쯤 읽으라고 권유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이 그의 말을 듣고 신문을 구독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설 비교토론 시간만은 매우 열나게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이튿날 한라산을 오르거나 올레길을 걸었습니다. 많을 때는 10여 명, 적을 때는 두서너 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라 걸었습니다. 학생들이 따라 나서지 않아도 그는 혼자 걸었습니다.

그는 시인 정지용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정지용 시집 '백록담'을 고전 목록에 포함시키고 학생들에게 읽고 암송하게 했습니다. '백록담'이란 시가 있는지를 아는 대학생은 제주도에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백록담을 줄줄 암송하면서 학생들을 야단쳤습니다. "제주도에 살며 그것도 모르면 되느냐"고. 학생들은 고인을 '문창재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한라산을 따라 올랐습니다. 그 덕분에 한라산 백록담을 처음 정복했다는 학생도 꽤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싱가포르, 캄보디아, 일본에서 온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인은 16년 동안 약 180회 정도 제주도를 왕래하며 약 350명의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또 한라산을 100번 올랐습니다. 그는 등산하지 않을 때는 제주도의 역사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제주섬의 신화와 전설이 잉태된 곳, 몽골인들의 남긴 흔적, 삼별초의 근거지, 추사 김정희 등 유배인들이 살던 곳,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진지, 4.3사건의 유적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6.25전쟁 때 생겨난 육군 제1훈련소를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몇 년 전 '제주사용설명서'란 책을 썼습니다. 그건 관광가이드같은 책이 아니라 제주의 역사 현장을 답사해서 쓴 일종의 역사 기행문입니다. 이런 공적이 인정되어 그는 몇년 전 원희룡 제주도지사로부터 명예도민증을 받았고 그걸 무척 영예롭게 여겼습니다.

3월 초 그는 몸 컨디션이 안 좋아 4월 HRA수업에 가지 못할 것같다고 말했습니다. 병이 깊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는 그렇게 탐닉했던 제주도에 다시는 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쉬워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가 처음 암 발병을 알게 된 것도 제주도에서였습니다. 6년 전 그는 HRA 수업에 참여하고 서귀포 해안을 산책 중 갑자기 통증을 느껴 급히 상경해서 진찰을 받았고 폐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와 제주도는 숙명의 관계였던가 봅니다.

그는 한라산을 함께 걸었던 제자들의 곡소리를 듣고 "이제 마음대로 한라산에 훨훨 오르십시오"라는 카톡 메시지를 받으며 행복하게 저세상으로 걸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간관계의 이치입니다. 그의 죽음을 보며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1960년대 세계를 미니스커트의 유행 열풍 속으로 몰아넣었던 영국 디자이너 메리 쿼안트가 93세로 숨졌다는 뉴스가 뜬 것을 보았습니다. 고인과 동년배의 사람들이 사회적 성적 자유를 외치던 60년대 청년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때 사람들이 죽음을 많이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창재 선배와 8년 전 후지산을 등산했던 기억이 선합니다. 후배들과 산행을 하거나 동우회 등 친목 모임에서 그는 앞장 서서 봉사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시간에 차질이 생기면 "내가 할 게"라고 말하며 동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비워놓은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집니다.

15년 전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 때 부음도 그 친구의 휴대폰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모니터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 "잘 있어? 언제 가까운 시일 안에 한 번 봅시다"고 말하자 수화기에서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친구 아내였습니다. "아이 아빠가 오늘 아침 죽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본인의 휴대폰을 통해 사망 소식을 받는 경우가 더욱 흔해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때도 느꼈고 이번에 다시 확인하게 됐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를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짧은 미래를 사는 지혜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에게는 먼 미래를 보며 꿈을 꾸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이든 사람에겐 내일 보다 오늘, 내달보다 이달, 내년보다 올해 절실하게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인은 가요 '봄날은 간다'를 즐겨 듣고 불렀습니다.

올해도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5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