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은 하루 세 번씩 고종에게 '문안 통화'
민간인 통화내용 감시하자 주한 외국인" 사생활 침해 "반발

미국이 우방국 정부 수뇌의 대화를 도청했다 해서 온 세계가 들썩거렸다. 당연히 우리 정부도 휩쓸려 들어 여야 간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한데 『사물로 본 조선』(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을 보면 '도청' 시비는 이 땅에 전화가 처음 들어왔던 100여 년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부터 일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일이다. 청나라에 갔던 영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여러 전기기기를 들여왔는데 전화선이 없는 상태였으니 당연히 사용되지는 못했다. 1898년 1월에야 궁궐과 정부 각 부서에 전화기가 설치되어 제한적이나마 전화 시대가 열렸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한 1902년 서울 인천 간 시외전화가 개통됐고 그해 6월 한성전화소를 설치해 민간인들도 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는 전선이 철선인 데다 기술도 떨어져 전화 통화 수준이 그야말로 바닥이었다. 감도가 떨어져 상대방 목소리를 들으려면 숨소리를 죽이고 옆 사람은 밖으로 나가야 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정부는 '통화 윤리'를 엄격히 시행했는데, 이를테면 한성전화소에서 공중전화는 5분 단위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다음 통화자가 있으면 10분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게다가 공중전화 옆에 감시를 위한 전화소 관리를 두어 통화 중 불온하거나 저속한 말을 쓰거나 언쟁을 벌이면 전화소에서 통화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러니 당시 전화를 주로 이용했던 주한 외국인들이 사생활 침해라고 들고 일어나 전화소 관리를 전화기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다. 요즘으로 치면 사람을 이용한 일종의 '도청 해프닝'이었다. 물론 1902년 서울의 민간인 전화 가입자는 총 24명에 한국인은 2명, 1905년엔 총 가입자 50명 가운데 한국인은 10명에 불과했다니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긴 했다.
한편 고종은 이 '신통한 물건'을 톡톡히 이용했는데 조 대비 문상을 전화로 하는가 하면 정부 관리들에게 수시로 직접 전화를 걸곤 했다고 한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한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은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현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에게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문안 인사를 전화로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나 부를 쥔 이들이 '얼리 어댑터'가 되기 쉬웠던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고종의 전화를 받은 관리들은 마치 황제를 직접 대하는 듯 관복을 갖춰 입고, 절을 한 뒤 통화를 했다고 한다.
하기야 당시 식자들은 예의를 갖춰야 할 점잖은 처지에 어른을 전화 통화로 불러 이야기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는데 이들 황제 부자는 그나마 신문에 대해 나름 개방된 인식을 갖췄던 것이 작은 위로가 된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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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