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9 11:15 (목)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④대만은행의 운명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④대만은행의 운명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1.2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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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행은 일본의 중앙은행 직속으로 '대만 금융권의 자산 45%' 보유해
스즈키쇼텐(鈴木商店),1차 세계대전 터지자 대만은행 돈 빌려 몸짓 키워
전쟁 끝난후 경영 어려움 겪으면서 '망조든 기업'에 가와고에번 뒷배 역할
일본은행이 지원불가 입장 표명해 전국 각지 '뱅크런' 확산되고 내각 와해

옛날에는 '경제학'을 '정치경제학'이라 불렀다. 정치와 경제가 따로 일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다단해졌다. 이제 정치와 경제는 분화돼 아예 다른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는 나뉠 수 없다. 잘못된 정치에서 올바른 경제가 나올 수 없다. 1920년대 일본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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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이 준 여파는 오래갔다. 2년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뜻하지 않은 '뱅크런'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와타나베은행이 망했다.

대지진과 은행도산. 이 둘 사이에는 관료와 정치권이 있었다. 여야(與野)의 대립과정에서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대장대신(大藏大臣) 가타오카 나오하루(片岡直温)의 실언(失言)이 문제가 됐다. 공식석상에서 그는 망하지 않은 은행을 "망했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해당은행이 망하게 되는 말실수를 한 것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가리켜 '가타오카의 실언(片岡の失言)'이라 이름 붙였다.

진재어음(震災手形) 문제가 '실언' 사건을 끝으로 마무리됐다면 일본이 겪었던 1920년대의 고통도 거기서 거의 마무리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가타오카의 실언' 사건이 터진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 이번에는 더 큰 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 역시 진재어음-정치권-관료가 뒤얽혀 불거졌다. 와타나베은행 때처럼, 이번에도 금융공황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규모만큼은 '가타오카의 실언' 사건을 넘어선다. 망가진 은행도 와타나베은행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중요했다.

대만은행의 융자거절로 스즈키쇼텐이 파산하게 됐음을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대만은행의 융자거절로 스즈키쇼텐이 파산하게 됐음을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과정을 보자. '실언' 사건 이후 진재어음법안을 둘러싼 여야 간 다툼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새로운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대만은행(臺灣銀行).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에 설치된 은행으로 발권력을 갖고 있던 특수은행이었으며 동시에 대만 최대 은행이었다.

일본의 중앙은행 직속으로 당시 대만 전체 금융권의 자산 45%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은행이 도산위기를 겪고 있었다. 자칫 '식민지 중앙은행 파산'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 뒤에 스즈키쇼텐(鈴木商店)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1874년 창업한 스즈키쇼텐은 무역업으로 돈을 벌다 제분ㆍ제당 등 소비재 제조업체로 몸집을 키우더니 제강(製鋼) 영역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한 중견기업이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사업성격을 일순간에 바꿔 버린다. 은행에서 거금을 대출해 철이나 설탕, 밀 등 식량과 원자재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던 것.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다. 매출이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무역회사 미쓰이 물산이나 미쓰비시 상사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 일본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스츠키쇼텐

하지만 투기적 성격의 사업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전쟁이 끝나고 1~2년이 지나자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원자재 값은 내리고 운임은 오르고 유럽의 제조업이 다시 소생하던 시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손실은 커져갔고 회사는 이 '손실분'을 대출로 메꿔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도 좋아질 기미가 없었고 결국 '손실'과 '대출'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출'의 주 원천이 대만은행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만은행은 '망조(亡兆)' 든 기업에 계속 돈을 빌려줬던 것일까? 여기에 1927년 '진재어음 결제법안'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 비밀은, 정치권과의 연계에 있었다. 스즈키쇼텐은 정경유착의 뿌리를 안고 태어난 기업이다. 창업주 스즈키 이와지로(鈴木岩治郎)는 도쿄 북쪽에 위치한 가와고에번(川越番)의 반도(番頭, 다이묘(大名)의 경호를 책임지던 지위)의 허락을 받아 사업을 시작, 정치와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동향(同鄕) 출신 정치인과 연계함으로써 스즈키쇼텐은 정경유착의 대표 기업이 된다.

스즈키쇼텐과 여당 의원들과의 관계는 진재어음법을 둘러싼 여야 공방 중 불거져 나왔다. 진재어음 절반이 스즈키쇼텐이 발행했으며 대만은행으로부터 대출은 물론 이미 상당한 금액의 어음을 할인받았던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했다. 자칫 엄청난 규모의 세금이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기업을 위해 쓰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만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 대만의 중앙은행인 대만은행은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의 산하기관이었다. 그런 은행이 도산한다면 국가적 차원의 불신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진재어음법은 결국 통과됐다. 1927년 3월 '가타오카의 실언' 직후의 일이었다. 야당은 두 가지 조건을 단 뒤 법안에 동의했다. ➀대만은행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➁대만은행과 스즈키쇼텐과의 관계 단절 등이 그것이었다.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것이 뻔했다. 대만은행과 스즈키쇼텐의 단절은 곧 둘의 동반 몰락을 의미했다. 경영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스즈키쇼텐은 대만은행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도산이 확실했고 그 경우 스즈키쇼텐의 어음과 대출을 갖고 있던 대만은행도 파산 등 심각한 문제가 닥칠 게 뻔했다.

1927년 4월 20일 일본 한 은행에서 벌어진 예금 인출 사태.<br> ※사진=https://www.sojitz.com/history/jp/era/03/
1927년 4월 20일 일본 한 은행에서 벌어진 예금 인출 사태.
※사진=https://www.sojitz.com/history/jp/era/03/

대장성은 급했다. 식민지 중앙은행의 도산은 결코 그냥 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긴급하게 일본은행에 대만은행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행은 대장성의 부속기관과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 '명령'하면 '수행'하는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일본은행이 '조건'을 달았다. "정부는 대만은행 지원에 따른 일본은행의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행은 대만은행에 대한 과도한 지원이 문제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대장성도 일본은행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손실액을 2억 엔으로 추정하고 이를 보상하겠다고 했다. '2억 엔'은 앞서 말했듯 '진재어음 미지급액'에 준하는 수준으로 거의 일본 명목 GNP의 1.3%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말'만으로는 곤란했다. 일본은행은 '법적 조처'를 요구했다. 확실한 것은 '의회 비준'이었다. 하지만 당시 의회는 거의 종료 시점이었다. 새로 법안을 만들고 비준하고 등의 시간이 없었다. 이 약속을 보장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천황의 명령' 곧 '칙령(勅令)'이었다. 당시 '천황의 명령'은 정부도 일본은행도 거역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칙령'을 발효하려면 형식적으로라도 그 성격의 타당성을 봐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거치는 기관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추밀원(樞密院)이었다. 추밀원은 1888년 헌법 초안 작성기관에서 만들어진 황실의 자문기구였다. 이후 추밀원은 황제의 보필은 물론 황실과 관련된 각종 현안을 해결하고 나아가 특정 권한을 갖는 특별재판소의 성격까지 갖는 기관으로까지 성장한다. 그런데 이 추밀원이 대장성이 요청한 대만은행에 대한 지원 관련 칙령을 거절했던 것이다.

정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추밀원이 칙령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은행의 대만은행 지원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이로써 일본과 대만의 금융 혼란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혼란의 발생은 즉각적이었다. 1927년 4월 17일 칙령의 발효가 거절되자 일본은행은 즉각 대만은행에 대한 지원이 불가(不可)하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알렸다. 18일 대만은행은 휴업을 알렸고 이후 수 일 동안에만 전국 각지에서 뱅크런이 발생한다. 3일 뒤인 4월 20일 책임을 통감한 와카츠카내각(若槻内閣)은 총사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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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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