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제국주의에 의해 고통받은 원주민들의 인권 신장 등을 요구하는 주장도 날로 커져

【시드니=성태원 편집위원겸 순회특파원】 22일(목)은 19일 장례식을 치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추도하기 위해 호주 정부가 일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정한 임시 공휴일이었다.
하지만 정부 뜻과는 다르게 이날 호주 곳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전환을 요구하는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져 추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2,600만 호주 국민이 모두 영 연방의 일원으로 왕정을 지지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여왕 서거로 그동안 호주 사회에 잠재해 왔던 공화정 전환 욕구가 생각보다 빨리 분출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지 언론들은 이날 수도 캔버라 외에 시드니와 멜버른, 브리즈번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시민들이 군주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수도 캔버라에서 호주 정부가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공식 추도식을 열고 있는 가운데 일부 시민들이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고 나서 주목받았다. 심지어 시위대는 여왕을 식민주의와 인종학살, 약탈 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며 비판하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드니에서도 이날 번화가인 타운홀 광장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대가 군주제 반대와 원주민 인권 신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후 3시쯤 필자가 타운홀 광장을 찾았을 때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성 시위자가 그 같은 주장을 반복해서 외치는 모습이 목격됐다.
아침 10시쯤 시드니 숙소에서 시내로 나가던 중에 갑자기 강한 비바람을 만난 필자는 도로 옆 어느 카페로 몸을 숨기면서 문득 "호주인들은 오늘 여왕 추도 임시 공휴일을 어떻게 보낼까"하는 생각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 소식을 접하게 됐다.
호주 제1도시답게 메트로시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드니에서 시위가 벌어졌던 타운홀 광장을 벗어나 바로 인근을 지나면서 동서로 길게 뻗은 '엘리자베스 스트릿(street)'을 만나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멜버른에서도 '원주민 저항 전사들'이란 인권 단체가 주도한 시위가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시위자는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 부분을 지운 호주 국기를 든 채 공화국 전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시위대는 영국 제국주의에 의해 고통받은 호주 원주민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폈다고 한다.
이날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살펴본 시드니 시민들은 여왕이 선사(?)한 공휴일(public holiday)을 아낌없이 즐기는 것 같았다.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하거나 친우들과 어울려 노니는 시민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타운홀 광장과 연결되는 번화가 '죠지 스트릿'은 휴일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느 비타민 판매 가게에 들어간 김에 20~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두 명과 얘기를 나눠봤다.
-여왕 임시 공휴일 어떻게 생각해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는데..
"휴일은 휴일이죠. 좋죠 뭐."

-찰스 3세가 호주 군주가 됐는데 좋으신가요?
"글쎄요. 어르신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찰스 왕도 좋아하겠죠. 찰스 3세가 호주 군주? 글쎄요, 젊은이들은 왕보다 대통령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지폐나 동전에 새겨진 엘리자베스 여왕 초상이 바뀔 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뭐, 대신 찰스 왕 초상이 들어가겠죠. 그래도 엘리자베스 여왕 초상이 금방 없어지기야 하겠어요. 시간을 갖고 차차 없어지겠죠."
비록 22일 추도 임시 공휴일이 시위대와 비판자들의 목소리로 얼룩졌다고 치더라도 70년간 재위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흔적은 아직도 호주인들의 머릿속에 너무나 뚜렷이 남아 있어 보였다.
호주를 다니다 보면 엘리자베스 시티, 엘리자베스 스트릿, 엘리자베스 몰, 엘리자베스 레인(LANE=골목길) 등등 유난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흔적이 눈에 많이 띈다.
거리 곳곳은 물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역사, 일상생활 등 호주인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여왕의 흔적은 언제쯤 사라질까. 아마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