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8:05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1) 4.19혁명날 '예산개혁'해외연수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51) 4.19혁명날 '예산개혁'해외연수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02.2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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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서 주저하자 이한빈 국장(전 경제부총리) "이럴 때일수록 떠나라"
예산에 문외한이었던 쓰루에게 이 부총리가 조익순 '과외교사' 붙여줘
공기업에 대한 기업회계 제도와 성과주의 예산 도입 등 예산개혁 성과
부처 예산 다루며 나라 살림 감각 익혀 국가 경제정책 짜는 밑거름으로
부하 직원 호되게 담금질하자 축출 연판장 나올 찰나 최각규 등이 막아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쓰루는 행운아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는커녕, 자신을 하잘것없이 여기는 윗사람 밑에서 하잘것없는 일에 부림을 당하기 일쑤다.

그의 경우에는 직속 상사가 아닌데도 남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만으로 그를 알아주는 사람, 즉 '출세의 은인'이 기가 막히는 순간에 나타났다. 그것이, 뒤를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가, 학연, 지연, 혈연 아무런 끈도 없는 촌놈 쓰루가 관료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그런 '은인'이 이한빈 씨였다.

(당시 이한빈의 예산국은 인재와 개혁의 산실이었다. 이 국장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유학파'로서 행정 체제에 관해 자기 나름의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1950년대에 경제기획원 같은 경제개발을 주 업무로 하는 부처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당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시절이었다. 쓰루는 자신을 알아준, 자신보다 세 살 아래인 이한빈 씨를 인생 및 직장 뿐 아니라 배움의 선배로서 늘 존경심으로 대했다. 그가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는' 몇 사람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건국초기 관리사회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시절이었다. 쓰루는 자신을 알아준, 자신보다 세 살 아래인 이한빈 씨를 인생 및 직장 뿐 아니라 배움의 선배로서 늘 존경심으로 대했다. 그가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는' 몇 사람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사진은 1980년 이한빈 부총리(좌)가 클라인스타인 주한 미국대사와 함깨한 모습이다. 사진=헤럴드포토.
건국초기 관리사회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시절이었다. 쓰루는 자신을 알아준, 자신보다 세 살 아래인 이한빈 씨를 인생 및 직장 뿐 아니라 배움의 선배로서 늘 존경심으로 대했다. 그가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는' 몇 사람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사진은 1980년 이한빈 부총리(좌)가 클라인스턴 주한 미국대사와 함깨한 모습이다.

예산4과는 교통부, 체신부, 전매청 등 부처 예산을 담당했는데, 이한빈 국장은 그들 부처나 국유기업들에 휘둘리지 않을 인물이 필요했다. 국유기업에 기업회계제도를 도입하는 등 예산제도 개혁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루는 성격만 강했지 예산이나 기업회계 등에는 문외한이었다. 이 국장은 그에게 워싱턴대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막 돌아온 조익순 고려대 교수를 붙여주었다. 예산국 안에 일종의 '개혁작업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국장은 그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미국국제개발처 자금으로 당시 우리보다 예산제도가 앞서 있던 대만, 필리핀 등에 시찰여행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원조 중에는 정책 수립 노하우를 습득하는 데에 필요한 실무연수 비용을 대주는 소위 '기술 원조'가 꽤 많았다.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성공 비결을 배우겠다고 오는 개도국 공무원에게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이 그런 기술 원조의 예이다.)

공교롭게도 쓰루 등 개혁작업반이 대만에 시찰 가느라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기로 한 날이 1960년 4월 19일이었다. 비행장에 모인 개혁작업반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이렇듯 어수선한데 출장을 가야 하느냐"를 묻는 그의 전화에 이한빈 국장은 "이럴 때일수록 떠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해외시찰단은 그날 예정대로 떠났다.

이 국장이 마련해준 그 소중한 기회는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성과로 보답되었다. 개혁작업반은 공기업에 대한 기업회계제도 도입, 성과주의 예산제도(performance budgeting) 도입 등 대한민국 정부 초기의 예산제도 개혁에 기여했다. 조익순 교수에게 기업회계에 관해 배우고 해외연수로 무장한 쓰루는, 중앙공무원연구소에서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예산제도를 강의할 정도로 일약 예산국을 대표하는 엘리트 과장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당시 예산국 근무를 통해 크게 두 가지를 얻었다. 당연히 그 첫번째는 예산에 관한 선진 지식이었다. 예산국에서의 그 경험이 없었다면, 훗날 예산에 관한 한 여타 부처의 장관이나 국회의원을 압도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작성과 추진을 지휘할 수 있었던 '부총리 쓰루'는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부처의 예산을 다루다 보면 나라 살림 전체에 대한 감각을 갖추게 된다. 나라 살림은 국가 경제정책 기조와 연결되는 것이니, 쓰루의 예산국 근무는 부총리로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그보다 쓰루가 더 소중하게 얻은 것은, 바로 김주남, 최각규 등 예산국 주무 사무관들, 그리고 특히 바로 옆자리에서 나날을 같이한 조익순 교수와의 평생 가는 교분과 신뢰였다.

그러나 소속 직원들한테는 쓰루 예산4과장 시절은 매우 불편한 시간이었다. '쓰루표' 부하 담금질 때문이다. 이재국 관리과장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담금질은 예산4과장이 되면서 '학구파 선진 관료' 이한빈 국장의 비호 아래 강도를 더해갔다. 한때 부하 직원들이 쓰루 축출 연판장까지 돌리려고 할 정도였다. 흥분한 직원들을 다독여 그의 '추방'을 막아준 인물이 김주남, 최각규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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