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치로 수백억 오가는 결정 할 때마다 '뇌물 부조리'개입에 불안
서둘러 미국유학 떠나기로 결심 … 쓰루후임 사무관 감옥행 소식 들어
쓰루 유학중 부인은 '선생과 양계업' 투잡하며 '서울 살이'의 밑천 마련
1·4 후퇴로 부산으로 피란 간 쓰루는 경남도청에 자리 잡은 중앙청에 다시 고시과장으로 귀임했다.
그러고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외자구매처(外資購買處)에 배치되었다. 외무고시에 패스한 사람이 어떻게 정부 조달 업무를 하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인사였다. 행정부 예산의 반 정도가 대충자금이라는 미국 원조였으니, 외무·재무 할 것 없이 영어 소통이 가능한 공무원을 원조물자 관리에 동원했던 것이다.
영어 선생을 하면서 갈고닦은 그의 영어 실력이 빛을 발하였음은 보나 마나다. 일본식 영어 발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영어를 한다는 '조선인' 대부분의 발음이 일본식이었으니까.
외자구매처 근무는 짧았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관료생활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그 근무를 통해 한국 경제(금융 및 재정)가 얼마나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지, 얼마나 경제적 자립이 절실한지 알게 되었다. 또 그 근무 경험은 그가 법학과 일반행정에서 경제학과 경제정책으로 눈을 돌린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훗날 그가 경제기획원 관료로서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는 극심한 외환 부족을 겪고 있던 때였다. 수입에 쓸 수 있는 원조 달러를 확보하면 그것 자체가 일확천금의 기회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외자구매처 신참 사무관의 도장 하나로 요새 가치로 치면 수백 억 원에 해당하는 정부 조달과 민간 불하 여부가 정해지곤 했다.
부조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느낀 불안은 커져만 갔다. 그것이 그가 '잘나가는' 외자구매처에 배치된 지 2년도 되지 않아 서둘러 유학을 떠난 이유였다. 그의 후임 사무관도 감옥에 갔다고 한다.
외자구매처의 업무 담당자가 뇌물로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 사실은 훗날 그가 4·19 혁명 후 민주당 정권 아래서 재무부 사세국장(지금의 국세청장)으로, 5·16 쿠데타 직후 신생 부처 경제기획원 예산국장으로 발탁되는 데 한몫을 했다. 그때의 경험 때문에 그는 '업자는 다 뇌물로 공무원한테서 장삿거리를 얻어 돈을 챙기는 족속'이라는 인상을 굳히게 되었고, 아예 업자를 만나지 않는 버릇도 그때 생겼다.
김 여사의 부산 피란생활은 남편보다 더 고달팠다. 피란 내려오며 가져온 메리야스를 시장에 나가 팔랴, 고성 시댁 살림 도우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으면, 은행에 가기 전에 천장에 쟁여놓은 돈에서 냄새가 진동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방향제를 뿌려놓아야 할 정도였다"는 게 그녀의 즐거운 추억거리였다.
이때 모은 돈은 훗날 쓰루의 미국 유학자금으로, 또 그의 유학 기간에 고성에 내려가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살 때의 생활비 등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쓰루가 유학 간 3년 동안 고성에 가 있던 부인은 거기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농사는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신은 고성여고에서 가정 등 두 과목을 가르치는 한편, 집에 양계장을 만드는 등 늘 무언가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번 돈은 남편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서울 성북동에 집을 마련한 후 부인이 본격적으로 '헌 집 수리사업'(전쟁으로 부서지거나 불에 타 하자가 있는 주택을 수리하여 파는 것)에 나설 때까지, 두고두고 유용하게 쓰였다. 그녀는 리모델링업자 1세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