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처형 소문에 친척집에서 숨어지내… 부인은 시장돌며 돌 벌 궁리
미아리서 성냥팔아 번 돈으로 동대문 메리야스 몽땅 사들여 부산 피난길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쓰루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일이 벌어졌다. 안정적이고 대접받는 경남중학교 선생 자리를 떠나 고등고시를 보기로 한 것이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시행하는 고등고시가 1949년 말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의 결심은 김옥남 여사의 등 떠밀기에 의한 것이었다. (부총리직 임명 수락을 포함해 그 후 그의 모든 중요한 진로 결정 뒤에는 늘 부인의 부추김이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는 선생 체질이 아니었다. 제자가 나랏일을 잘하도록 가르치면서 나라가 잘되는 것을 기다리라는 것은, 그더러 '쓰루 짓' 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생질'은 그의 급한 성격에는 너무 안정적이었다. 경남중학교 선생 일에 안주할 성격도 아니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의 포부와 재능은 다른 데에 쓰임새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관직에 있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필동에 있는 김 여사의 친척 집에서 고시 공부에 들어갔다. 반년 정도의 준비 후 1949년 말에 필기시험을 치렀다. 1950년 3월에 첫째 아들이 태어났고, 바로 4월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가 지원한 것은 외무고시라고도 불리던 행정고시 3부 외교과였다.) 쓰루의 장자가 복덩이 대접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곧이어 면접시험을 쳤다.
당시엔 사람, 특히 관료를 뽑을 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평가 기준이 신언서판(身言書判·몸가짐, 언변, 글쓰기, 판단력 네 가지로 사람됨을 판단했던 옛 기준)이었다. 5월 3일 자 신문에 발표된 최종 합격자 중에 그는 수석이었다. 그가 여러 면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임은 분명했다.
1950년은 쓰루로서는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해였다. 고등고시 수석 합격 덕에 중앙청 고시과장(행정 조직이 소규모였던 당시는 광화문 뒤편에 있던 중앙청 건물 하나에 대부분의 중앙행정 부처가 들어갈 수 있었다)이 되는 데까지는 좋았다. 바로 그다음부터 수직낙하의 연속이었다. 최연소 중앙청 과장의 지위를 누릴 틈도 없이 한국전쟁이 터졌다.
중앙청 과장이 된 후, 쓰루 부부는 대통령 관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옆 효자동에서 살고 있었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인민군의 남침을 잘 막아내고 있다'는 정부의 말도 있고 또 '전쟁 터졌다고 공무원이 도망갈 수 있느냐'는 생각에 피란을 가지 않았다.
6·25 사변이 터지고 2~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쓰루 가족 세 사람은 대통령 관저 주변의 위험을 피해 필동의 김 여사 친척집으로 다시 옮겨 가 있었다. '공무원, 경찰, 군인 등은 다 인민재판을 해 죽창으로 처형한다'는 소문도 소문이지만, '남자들은 다 잡아가서 인민군으로 전선에 보낸다'는 소문에 그는 집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소에는 방 안에 머물다가 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나면 바로 천장으로 통하는 다락방으로 몸을 숨기는 생활이 그해 9·28 서울 수복 때까지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숨어 있던 친척 집은 부유했다. 적어도 쌀은 여러 식구가 몇 달 먹을 여분이 있었다고 하니 꽤 부자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김 여사는 전쟁 중이지만 미아리 쪽의 장터에 가보기로 했다. (인민군 치하에도 장은 섰고 그중에 미아리 장이 제일 컸다고 한다.) 그냥 물건을 사러 간 게 아니었다. 전쟁 중 물자 수급 상황을 알아보러 간 것이었다. 그녀 눈에 바로 띈 '전쟁 중에 없는 물건'은 성냥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에는 효자동에 살 때 주변(지금의 서촌)을 산보하다가 본 성냥 공장이 떠올랐다.
다음 날 그곳에 가봤더니 공장 주인은 피란 가고 없고, 달랑 직원 한 사람이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튿날 그녀는 일하는 사람을 데리고 성냥 공장에 갔다. 그리고 가져간 몇 가마니의 쌀과 공장에 남아 있던 성냥을 몽땅 맞바꿨다.
그다음 날 미아리 장터에 나가 성냥을 팔아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난 성냥은 불티나게 팔렸다. 인민군 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거래는 남한 지폐인 한국은행권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인민군은 물자를 제공한 사람들에게 (훗날 물자나 화폐로 바꿔주기로 약속하는 일종의 돈표인) 인민군 군표를 주려고 했으나, 상인들이 그 군표를 받으려 하지 않아 할 수 없이 남한 화폐를 계속 쓰게 했다는 얘기다.
9·28 서울 수복이 있고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김 여사는 서울 동대문 쪽의 메리야스 공장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녀가 찾아간 그 공장도 성냥 공장과 사정이 비슷했다. 주인은 피란 가서 돌아오지 않은 채 직원이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성냥팔이로 번 돈으로 공장에 남아 있는 메리야스를 몽땅 사들였다. 훗날 그녀는 가끔 자식들에게 "1·4후퇴 때 빌린 트럭에 메리야스를 가득 싣고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때 그렇게 편하고 뜨듯하게 부산까지 피란 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우리 식구 말고는 없었을 것"이라며 자랑하곤 했다. 집안에서 가계경제에 관한 쓰루의 발언권은 더욱 위축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