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22:35 (수)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② 잉글랜드銀 설립秘話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② 잉글랜드銀 설립秘話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0.11.02 0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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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영국왕 윌리엄 3세와 영국 금융가의 '짬짜미 계약'
'태양왕' 프랑스 루이14세와 갈등 깊어지자 큰 돈의 전쟁자금 절실
청교도와 명예혁명 뿌리는 세금문제…통치기반 약해 증세 어려움
중국'디지털 위안화'는 지폐 제조1000년 만에 '국제통화'등극 야망

2020년 10월 중국이 세계 금융사에 한 획을 그으며 다시 한 번 역사에 그 이름을 올렸다.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디지털 위안화를 법정화폐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인민은행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것이다. 2020년 4월 시험단계 돌입 후 6개월 만의 일이다. 디지털 화폐를 법정화폐로 결정한 것은 이게 세계 최초로, 중국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마저 바꿨다.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대신 'DCEP(Digital Currency Electronic Payment)'라는 용어를 새로 만든 것이다. '중국은 디지털 화폐에 관한 한 표준을 만드는 세계의 리더'라는 얘기와 다름 아니다. 화폐와 관련해 중국은 이미 중요한 역사를 만든 이력이 있다. 11세기 송나라 때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交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중국이 이제 1000년 만에 자신이 만든 종이돈에 종지부(終止符)를 찍었다. 새 천년을 여는 포부로 들릴 수도 있다.

1000년 전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交子)
1000년 전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지폐 교자(交子)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전략은 단순하지 않다. 그저 기술이 불러온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거나 중국의 디지털 기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겠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의 세계제패 야망이 담겨 있다. 위안화를 국제결제 통화로 널리 유통시키겠다는 복안(腹案)이 있으니 미국 달러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 "미국과 중국은 국제 통화를 놓고 열전(熱戰, hot war) 중"이라는 스티븐 배넌 전 미국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말에도 이 같은 의미가 담겨 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최근 한 보고서를 통해 "10년 안에 위안화가 엔화를 밀어내고 달러와 유로화에 이어 3대 기축통화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 1000년 전 세계 첫 종이돈 만든 중국, 이번에는 세계 첫 디지털 화폐

우리는 지난 회 글에서 은행의 초기 역사에 대해 살펴봤다. 초기 금융사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설(異說)이 있다. 하지만 ①세계 최초의 종이돈은 11세기 중국에서 만들어진 교자라는 점, 그리고 ②이탈리아의 상인 겸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1300년 전후 발간한 자신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에서 교자를 소개했다는 점, 또 ③이탈리아 기업인들이 이를 참고해 은행에서 발행하는 초기 지폐인 은행권을 만들었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큰 이견(異見)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많은 역사가들은 ④이후 은행권은 17세기 들어 최고 강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유럽 전체에 퍼져나갔다고 본다.

1000년 뒤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디지털 화폐 ‘디지털 위안’
1000년 뒤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디지털 화폐 '디지털 위안'

이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1668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나 1657년 설립된 그의 전신(前身)이자 세계 최초의 국영은행 스톡홀름은행은 네덜란드가 아닌 스웨덴에서 설립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왠지 초기 금융과 관련해서는 스웨덴이 더 선진국 아니냐는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난 번 글에서 설명했듯 스톡홀름은행의 설립자 요한 팔름스트루크스(Johan Palmstruchs)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은행가 겸 기업인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갈고 닦은 노하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 스웨덴 국왕을 설득, 국영은행이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을 뿐이다.

또한 릭스방크를 세계 첫 중앙은행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사실도 지난 번 글에서 지적했다. 중앙은행의 첫 번째 역할로 여겨지는 '화폐발행의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릭스방크의 전신 스톡홀름은행에 발권력을 줬다 대형 사고를 친 이력이 있었던 탓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진정한 세계 첫 번째 중앙은행으로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영란은행)을 꼽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다. 잉글랜드은행의 '중앙성(中央性)'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속성은 무엇보다 국가소유라는 데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잉글랜드은행은 국가 것이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은 민영은행'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알까?

이런 생각을 해 보자. 언제부터인가 '수익모델' 또는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말이 일상어처럼 쓰인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이는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어떻게 판매하여, 얼마만큼의 수익을 올릴 것인가의 내용을 담은 기업의 사업 계획이나

그러한 사업 시스템'이다. 한 마디로 '돈 벌이용 사업계획이나 그 시스템'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잉글랜드은행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다. 잉글랜드은행은 시장경제의 역사를 넘어 인류 역사 통틀어 '최강의 수익모델'이라 할 만하다. 이 수익모델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그냥 찍으면 되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게 아닌, 돈을 찍어내는 수익모델. 이 정도면, 그저 우스갯소리로도 치부될 수 있을만한, 인류 역사상 최강의 수익모델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곧 힘'이라 했다. 돈을 장악한 이들은 나아가 자국의 국가 권력은 물론 다른 나라의 국가 권력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잉글랜드은행은, 은행을 지배한 소수의 금융인들이, 말 그대로, 자본과 정치권력을 모두 아우르는 최대 권력자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수익모델이었다. "잉글랜드은행의 출범은 바야흐로 소수의 금융과 금융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첫 걸음이었다"는 평가까지 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잉글랜드은행의 설립은, 금융인들에게, 실은, 돈 한 푼 들이지 않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돈 안 들이고 인류 역사상 최강의 자금력과 정치권력을 갖는다! 머리 잘 쓰고 운 때 잘 맞고 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이런 행운을 '잡을 수', 아니 '만들 수' 있다.

제임스2세.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킨 신교도들은 구교도 제임스2세를 폐위시키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2세와 남편 윌리엄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제임스2세.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킨 신교도들은 구교도 제임스2세를 폐위시키고 신교도인 그의 딸 메리2세와 남편 윌리엄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 이익은 우리 것, 손해는 국민 것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과정은 그야말로 교묘하다. 거래하는 당사자 모두가 윈윈(win-win)이 다. 그것도 엄청난 '윈(win)'. 거래자 A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원금이나 이자상환도 없이, 거액의 돈을 대출받으며 영원한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거래자 B의 이득은 더 크다. 얼마간의 돈을 넣으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자본력과 정치적 권력을 얻는다. 그것도 영원히. 게다가 들어간 돈은 바로 뽑을 수 있다. 즉, 이 또한 돈이 안 들어간다!

이 얼마나 좋은 거래인가. 여기에 A와 B 모두에게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거래에 들어가는 비용 또는 리스크는 모두 이 거래와 상관없는 C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그런 거래가 있다고? 기가 막힌다고? 그렇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과정이 진짜 그랬다.

이 과정을 말하기 전에 참고삼아 알아둬야 할 게 있다. 잉글랜드은행 설립은 워낙 오래 된 얘기인 데다가 설립과정 자체가 비밀스러웠고 기록도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있는 기록도 상이한 경우가 많다. 후대 역사가들의 해석이 조금씩, 때로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도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제임스2세의 딸 메리2세 및 사위 윌리엄3세.
제임스2세의 딸 메리2세 및 사위 윌리엄3세.

그러니 지금부터의 얘기는, 어느 정도의 자료를 검토한 뒤 필자의 주관적 해석에 따라 재구성한 것임을 밝힌다. 이를 참고로 이야기를 들어주기 바란다.

자, 이제 320년 전 잉글랜드은행을 둘러싸고 벌어진 기막힌 거래를 살펴보자. 거래의 두 당사자는 영국에서 왕으로 추대 받아 네덜란드에서 바다를 건너 온 영국왕 윌리엄3세와 영국의 금융가 겸 사업가 윌리엄 패터슨(William Paterson)이다. 여러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눈 두 당사자가 기획 및 합의한 핵심 거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패터슨은 잉글랜드은행을 유한회사(주식회사) 형식으로 설립해 금융인들로부터 120만 파운드를 모금한다.②이 돈으로 윌리엄3세가 발행한 국채를 산다.③윌리엄3세는, 국채의 원금에 대한 상환 의무는 없으며 이자는 연 8%로 한다.④은행은 국채를 담보로 은행권을 발행한다.⑤은행은 정부의 대출과 예금을 독점적으로 관리한다.⑥이 계약의 기한은 12년으로 한정한다.

거래의 겉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거래의 이면까지 읽으려면 엄청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딱딱한 형식의 설명보다는 문답 형식으로 하나하나 짚어보는 게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처럼 말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은행가 겸 기업가 윌리엄 패터슨과 1694년 그가 주도해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날인(捺印)식 장면.
스코틀랜드 출신 은행가 겸 기업가 윌리엄 패터슨

【문1】 윌리엄3세는 왜 120만 파운드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나?

【답1】 종교개혁이 시작된 해가 1517년이다. 잉글랜드은행의 설립은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뒤 일이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이 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게 1620년 일이었으니 잉글랜드은행 설립은 그때로부터도 70년 이상 흐른 뒤였다.

그럼에도 당시 유럽 전역은 신ㆍ구교 갈등이 심각했다. 또한 정교(政敎) 분리가 아직 미흡했던 탓에 종교갈등은 정치갈등과 엮여 있었다. 당시 구교의 중심은 '태양왕'으로도 불리는 프랑스 루이14세. 그는, 당연히, 신교의 중심이자 막강한 패권을 휘두르던 네덜란드와 갈등을 빚었다. '전쟁불사'를 외칠 지경에까지 이른다.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3세 역시 이에 위협을 느낀다. 그 역시 전쟁을 준비해야 했고 이를 위해 큰돈이 필요했다.

【문2】 돈이 필요하면 왕실은 세금을 걷는 게 일반적인 시기였다. 그런데 왜 윌리엄3세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국채를 발행하려 했나?

【답2】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무엇보다 네덜란드 출신인 윌리엄3세가 영국의 왕이 되는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네덜란드 총독의 아들이었던 윌리엄3세가 영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인 메리2세 덕이었다.

명예혁명의 주역이었던 영국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이었던 왕 제임스2세를 내쫓고 개신교도였던 그의 딸 메리2세를 왕위(王位)에 옹립하려 했던 것이다. 메리2세는 남편 윌리엄을 공동 왕으로 추대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니 윌리엄은 전적으로 아내 덕에 영국이라는 대국의 '왕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94년 그가 주도해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날인(捺印)식 장면.
1694년 그가 주도해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의 설립 날인(捺印)식 장면.

또한 윌리엄3세가 맡은 영국은, 지난 40년 동안, 그 어느 나라보다 커다란 정치적ㆍ종교적 격변을 겪은 나라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영국 내 신ㆍ구교 갈등은 '내란'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1640년 청교도 혁명이 나면서 실제로 영국은 내란의 아픔을 겪었고 이어 국왕이었던 찰스1세의 처형(1649년)과 이후 찰스2세의 왕정복고(1660년), 그리고 찰스2세의 동생인 제임스2세의 왕위 등극(1685년) 등 숨 가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제임스2세의 왕위 등극 3년 뒤인 1688년에는 이른바 '명예혁명'이 발발했고 이는 또한 제임스2세의 도피(1688년)와 폐위(1689년)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의 오렌지공(公)'으로 불리던 윌리엄3세의 왕위 등극은 그 최종 결과였다.

결론적으로 영국에 대한 윌리엄3세의 통치는 쉽지 않았다. 전적으로 아내 덕에 왕이 된 사람이니 태생적인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것부터 어려웠다. 거기에 타국 출신이었다. 아무리 본국에서 자기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해도 영국이라는 나라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내 메리2세와 함께 "왕은 존재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권리장전에 서명한 왕이었다. 예전 같은 절대 권력을 누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40년의 격변의 세월의 계기가 됐던 것이 다름 아닌 세금이었다.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모두의 발발 배경에는 세금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돈이 필요했다 해도 윌리엄3세는 결코 세금을 입에 올릴 처지가 못 됐다.

■ 이익은 내 것, 손해는 남 것

【문3】 세금을 걷을 처지가 못 돼서 국채를 발행한다 치자. 잘 팔리면 고민이 없었을 것이다. 국채가 인기가 없었나?

【답3】 그랬다. 아예 국채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외국 출신이고 힘도 권위도 없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청교도혁명 이전만 해도 부자들에게는 국가기관인 조폐국에 돈을 보관하는 관습이 있었다. 조폐국이라는 것이 사람이 침입할 수 없는 런던탑에 위치해 있었던 데다가 아무래도 국가기관이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찰스1세가 이 '믿음'을 망가뜨렸다. 1640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실패하자 전비(戰費) 마련을 위해 이 돈을 몽땅 털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런던의 부자들은 더 이상 돈을 조폐국에 맡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산을 금세공업자(Goldsmith)들에게 맡겼다. 잘 알려진 대로 금은 부드럽고 빛이 나고 영원하다. 그래서 금을 자르고 갈고 아름답게 꾸미는 세공업의 역사는 길다. 고대 이집트의 황금가면을 생각해 보라.

16~17세기 유럽의 금세공업은 폭발적으로 발전을 시작했는데, 신대륙의 발견과 그곳으로부터의 엄청난 금ㆍ은의 유입 때문이었다. 워낙 엄청난 규모여서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금ㆍ은 유럽 전체의 물가를 올리는 주범이었고 스페인의 몰락이 이 물가관리의 실패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금 세공업자들의 주요 작업은 주로 금을 보관과 이동이 편하도록 금괴나 금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값비싼 금을 보관하기 위해 사병(私兵)까지 쓰는 등 안전과 보안에 남다른 신경을 썼다. 자기 집이 조금 불안한 부자들은 그래서 이들에게 자기 금을 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영국의 부자들은 이제 더 이상 왕과 왕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국채도 사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준비에 큰돈이 필요했던 윌리엄3세는 난감했을 것이다.

【문4】 국채에 대한 원금 상환은 당연하다. 그런데 원금을 상환하지 않는다니. 그럼 돈을 떼어먹는다는 얘기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그리고 국채에 대한 이자 8%는 누가 내나? 왕이 내나?

【답4】 돈 빌리는 사람은 꿈을 꾼다. 채권자는 원금을 안 받겠다 하고 이자는 다른 사람이 자기가 내겠다고 하는 '꿈'이다. 그런데 채무자인 윌리엄3세는 이 꿈을 이뤘다. 패터슨이 "원금은 안 갚고 이자는 국민이 세금으로 부담한다"는 왕의 조건을 수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조건'이 있었다. 국채를 담보로 은행권(Bank Note)을 찍게 허가해 준다는 것이었다. 은행권에 대해서는 이미 스웨덴 중앙은행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최강의 군사 및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비록 은행권 발행, 중앙은행 설립 등의 측면에서는 스웨덴에게 '최초'의 자리를 내줬으나 네덜란드는 금융 부문에서도 당대 최강이었다.

윌리엄3세도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그가 제임스2세와 일전(一戰)을 각오하며 영국에 왔을 때 그 경비를 이들 네덜란드 금융인이 댔다. 그리고 이들은 윌리엄3세와 영국에 도착해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이가 됐다. 이들은 이미 은행권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스톡홀름은행의 은행권이 발행된 지도 3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이 은행권은, 비록 마지막에는 망가지기는 했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후 유럽 전역에는 오늘날 지폐처럼 쓰이는 은행권이 우후죽순으로 발행됐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

만일 은행권이 발행되기만 한다면, 돈벌이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무엇보다 바로 돈을 찍어 국채를 매입한 120만 파운드 대부분을 건질 수 있었다. 만일의 인출 사태를 대비해 준비금조로 10%의 정화를 구입해야 했지만 그 정도는 큰돈이 아니었다. 이를 근거로 더 많은 돈을 찍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약삭빠른 은행가들, 영국에서 시작해 대출로 돈 맛을 본 금세공업자들, 이들은 이미 은행권이 어떤 파워를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은행권은 그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잉글랜드은행은 결국 은행권을 발행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첫째, 잉글랜드은행은 출발부터 이미 은행권을 국채와 연계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처럼 자리를 잡았다. 은행권과 국채의 연결은 왕실과 은행 모두에 득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실 입장에서는 ①대출받기가 용이했고 ②은행권 남발을 제재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은행 입장에서는 ①반(半) 합법적으로 돈을 발행해 은행권의 신뢰를 높일 수 있었고 ②정부에 대한 대출 규모를 지속적으로 늘림으로써 국채에 대한 이자 수입을 늘일 수 있었으며 또한 ③정부에 대한 용이한 대출과 대출 규모의 확대로 정부와 왕실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수 있었다.

둘째, '원금 상환 면제'의 문제는 사실 당시 사고(思考)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자를 지급하니 언젠가는 국채 매입자에게 원금 이상의 이익이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국채 이자도 높았다. 14%가 보통이었다. 따라서 당시 국채 매입은 연금가입의 의미로 여겨졌다. 연금 형식으로 7~8년 보유하면 원금을 뽑고 이후에는 거저 얻는 수익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국채는 연금 형식이었다"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생겨났던 것이다.

셋째, 국민세금으로 받는 연간 8%의 이자는 고스란히 잉글랜드은행의 수입으로 잡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르다. 한국은행은 국가 소유다. 이익이 난다면 당연히 국가에 귀속된다. 하지만 잉글랜드은행은 주식회사 형식이었다. 이익이 나면 당연히 주주 또는 투자자들이 가져간다. 물론 이 '주주'에는 국왕도 포함된다. 국왕과 일부 은행가들이 국민세금을 자기 수입으로 가져갔다는 얘기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로, 방대한 분량으로 잉글랜드은행의 초기 발전사를 저술한 『잉글랜드은행: 하나의 역사(The Bank of England: A History)』(1945)의 저자 존 H. 클래펌(Sir John Harold Clapham)은 책에서 이 같은 잉글랜드은행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잉글랜드은행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며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 민영 중앙은행 국유화에 250년 걸려

【문5】 "은행은 정부의 대출과 예금을 독점적으로 관리한다"는 것과 '12년 한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실제로 잉글랜드은행의 특권은 12년 뒤 없어졌나? 【답5】 당시 잉글랜드에는,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민간이 세운 은행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잉글랜드은행과 경쟁관계였다. 따라서 "정부의 대출과 예금을 독점적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은행은 배타적 특권을 국가가 인정한, 국내 유일무이한 은행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든 특권의 기한을 12년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윌리엄3세를 비롯해 왕실 또는 정부가 잉글랜드은행이 갖는 엄청난 특권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특정 시기를 한정해 문제가 될 경우 이 특권을 없앨 수 있다는 왕실과 정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계약은 12년 지난 뒤에도 계속됐다. 12년이 뭔가. 잉글랜드은행이 국가에 귀속돼 '민간소유 은행'의 속성을 탈피한 데에는 무려 25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은행이 주식회사 형태로 이토록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다. ①정부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돈 구하기가 쉬웠다는 점. ②시간이 지나면서 부채가 너무나 늘어나 잉글랜드은행 없이는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웠다는 점, 그리고 ③은행가들이 왕실에 수시로 뇌물을 바쳤다는 점 등이 주요 이유로 꼽힌다.

잉글랜드은행은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유화됐다. 은행 설립연도가 1694년이 정확히 말하면 252년이 지난 뒤였다. 이후 잉글랜드은행은 영국 법무부가 50%의 지분을 보유한 공기업으로 다시 전환돼 오늘에 이른다. 잉글랜드은행의 역사는 결국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①1694년부터 1946년까지, 즉 252년 동안 민간 소유 주식회사로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윤을 창출해 왔고, ②1946년부터 1998년까지 52년 동안 국가기관으로 중앙은행의 역할을, 그리고 ③1998년 이후부터는 다시 기업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난 번 글과 이번 글은 20세기 최초의 경제위기인 1907년의 패닉과 연방준비제도(FRS), 그리고 영화 <바람과 라이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도 1907년의 위기와 FRS는 물론 영화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못 했다.

대신 수백 년 전 화폐와 은행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일부 독자가 의아해 할만하다. 하지만 성급해 하지 말자. 20세기 최초의 경제위기와 FRS가 본격 등장하는 다음 글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4세기 무렵 시작된 유럽의 초기 은행사, 특히 잉글랜드은행의 설립사를 알아야 20세기 경제위기의 역사가 보인다. 이를 위해 딱 하나만 기억하자. 1694년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은, 이 글 제목처럼, 돈벌이를 위한 '인류 최강의 수익모델'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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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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