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경제개발계획'은 외국정부와 국제금융기구 입김배제 KDI 등서 '자립'으로 수립
정부 주도 방식서 탈피해 큰 방향만 정하고 구체적인 사업은 기업이 선택하도록 유도
쓰루는 3차 계획의 성격을 "정부는 큰 테두리만 정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은 기업가가 선택도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 2차 계획이 정부가 민간(기업)에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식이었다면, 3차 계획은 나라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예시'하는 스타일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예를 들어 1, 2차 계획이 '○○ 규모의 ○○ 공장을 ○○개 건설한다' 등 개별 사업계획을 나열하는 식이었다면, 3차 계획은 '나라경제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산업을 육성한다' 등 부문 단위의 큰 줄기와 그 가이드라인만 정하고, 구체적 사업 선택과 투자 결정은 민간기업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쓰루는 그가 정책을 홍보하거나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할 때 주로 쓰는 수법을 3차 계획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5개년 계획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높이기 위해 해외 전문가나 국제금융기구의 평가를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 국내에 가장 폭넓게 좋은 반향을 일으킨 것은, 1970년 5월에 방한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세계은행 총재의 한국 경제 발전상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맥나마라 총재는 김포공항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워싱턴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의 경제 발전에 관한 찬사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도착 성명에서 그는 "한국은 지난 수년 동안 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고 찬양하면서 "세계은행에 있는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한국이 우리들 세대에 있어서 놀랄 만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는 데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특전을 누릴 것"이라고 박 정권의 경제 발전 업적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는 빈말이 아니었다. 세계은행은 인도 등 폐쇄적 산업화 전략을 택한 나라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던 차였다. 그들은 세계은행 등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경제개발 전략으로 저개발과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국제사회의 지원 부담만 늘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출 주도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한국은 개방적 산업화의 모범 사례를 제공하고 있었다.
쓰루와 맥나마라는 첫 만남부터 죽이 맞았다. 맥나마라가 한국에 도착해 바로 기획원으로 가서 쓰루와 가진 1시간 반에 걸친 만남은 한국과 미국의 두 '인간컴퓨터'가 서로 성능을 겨루는 경연 같았다. 수출, 수입, 외자, 가족계획, 농촌개발 등 무슨 주제이건 맥나마라 총재가 묻는 즉시 쓰루는 시원시원하게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우선순위 설정 감각, 명쾌한 성격과 의사 표시, 신속한 상황 판단과 정확한 분석력 등에서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를 죽마고우처럼 느끼게 된 것은 경제개발에 관해 같은 고민, 같은 정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쓰루의 안내로 청와대를 예방한 맥나마라 총재는, 한국 경제에 대한 솔직한 충고를 바란다는 박 대통령에게 "한국 경제의 발전은 하나의 기적이며 이 기적을 이룩한 요인은 첫째, 정부나 사업가나 국민 모두의 의욕적인 자세와 자부심, 둘째, 높은 교육 수준, 셋째, 대통령 이하 행정부의 탁월한 영도력에 연유한다"고 말했다.
이는 바로 쓰루와 박통이 공유하고 있던 경제 발전 정책관이었다! 그는 "한국 경제의 장래에 별 문제점이 없다고 보며, 얼마 전 시작된 안정정책이 효과적이며 전망은 매우 고무적"이라는 분석까지 덧붙였다. 맥나마라가 박통과의 면담에서 한 얘기들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구구절절이 임기 1년 차부총리 쓰루에 대한 칭찬으로 일관됐다.
쓰루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식을 수 없었다. 세계은행 총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편안하게 유머까지 주고받는 한국의 부총리를 뿌듯하게 생각하는 듯, 언론도 맥나마라 총재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와 쓰루의 동선을 따라가며 보도 경쟁에 열을 올렸다.
1970년 10월에 방한한 세계은행 협의단의 한국 경제 평가는 3차 계획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이었다. 과도한 투자, 통화 팽창, 물가 불안, 외채 등에 관한 '일상적인 우려'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기자들에게 그 평가를 전하는 쓰루는 1년간 공부한 끝에 시험에 합격한 듯 의기양양 그 자체였다.
3차 계획은 말 그대로 우리의 손으로 수립한 최초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자립'인 것이다. 그만큼 외국 정부나 국제금융기구의 입김이 최소화되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 초에 설립된 한국개발연구원(KDI) 학자들과 기획원 관료 등 국내 인재들이 지대한 기여를 했다. 또한 고도성장으로 계획 추진에 필요한 재원을 국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강화된 덕분이었다. 특히 경제개발과 소득 증가에 따라 미국이나 세계은행 에 손 벌릴 일이 줄어들고 있었으니, 그만큼 경제계획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