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외교의 거두로 통하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4일(현지시간) 코로나19 사태로 세계 질서가 바뀔 것을 염려하며, 각국이 자유세계의 질서를 지켜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신저는 이날 경제전문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끝나더라도, 세계는 그 이전과는 전혀 같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은 바이러스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계획하는 시급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병사로 '벌지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키신저는 "팬데믹의 초현실적인 상황은 벌지 전투에서 느꼈던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면서 "1944년 말이 아닌 지금, 특정 개인을 겨냥한 것이 아닌, 무작위적이고 파괴적인 공격의 느낌이 있다"고 분석했다.
벌지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패해 프랑스에서 철수하던 독일이 1944년 12월 16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영토에서 갑자기 반격을 가해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안긴 전투를 일컫는다. 키신저는 2가 세계대전 당시 전투와 코로나19 사태를 비교하며 “근본적인 차이는 당시 미국이 궁극적인 목표 아래 강한 인내심을 발휘했다면, 지금은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키신저는 "국가의 번영은 국가기관이 재난을 예측하고 충격을 막고 안정을 복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면서 "팬데믹이 끝나는 시점에, 수많은 국가기관들은 실패한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각국 지도자들은 이번 위기를 국가 단위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정작 바이러스는 국경을 인식하지 않는다"며 개별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도 비판했다.
키신저는 "희망하건대 보건 위기는 일시적일 수 있지만, 정치·경제의 격변은 세대에 걸쳐 이어질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자유세계의 질서’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키신저는 "글로벌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시대에서, 시대착오적인 ‘성곽 시대(walled city)’ 사고가 되살아날 수 있다"면서 "전 세계 민주 세계는 계몽주의 가치들을 유지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