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8 23:47 (월)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자고나니 그룹이 해체됐다"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 "자고나니 그룹이 해체됐다"
  • 성태원 이코노텔링 편집위원
  • iexlover@hanmail.net
  • 승인 2019.10.14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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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기반을 둔 재계 7위의 '국제그룹' 5공 전두환 정권에 의해 '타살'
'정치자금 적게 내 밉보였다' 소문파다…87년 민주화후 와신상담 무산
'평생키운 기업도 정권 사냥감'이란 인식 변했지만 기업인들 '권력눈치'

“자고 일어나니 그룹이 해체되어 있었다.”

10년 전인 2009년 봄에 작고한 양정모(당시 88세) 국제그룹 회장이 남긴 통한(痛恨)어린 말이다. 40년 각고의 노력 끝에 축성한 재계 7위의 그룹이 권력에 의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34년 전인 1985년 2월 21일 해체 당시 국제그룹은 연간 매출 8조 원 상당, 수출 9억 달러 상당, 21개 계열사에 종업원 3만8000명을 둔 재계 상위 그룹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 존재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국제그룹은 70~80년대에 신발사업을 모태로 성장해 한국 기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룹이다.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왼쪽)은 85년 2월 평생키운 국제그룹의 해체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그는 민주화이후 10여년간 국제를 되찾기위해 국회와 법원 등을 상대로 원상복구를 갈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연합뉴스 TV 캡처.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왼쪽)은 85년 2월 평생키운 국제그룹의 해체를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그는 민주화이후 10여년간 국제를 되찾기위해 국회와 법원 등을 상대로 원상복구를 갈망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연합뉴스 TV 캡처.

국제그룹은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 부산을 근거지로 성장했던 향토 기업이기도 했다. 사세(社勢)가 커지자 서울까지 진출해 84년 당시 63빌딩에 버금가는 용산 국제빌딩을 세우기도 했다. 국제란 이름은 잊었지만 왕자표(고무신)나 프로스펙스(운동화) 브랜드를 기억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다.

약 100년의 한국 기업사를 통틀어 국제만큼 비운(悲運)이었던 기업은 잘 없었다. 5공 전두환 폭압정권에 밉보인 죄로 순식간에 대(大)그룹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재무부와 당시 국제그룹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을 동원해 단숨에 국제의 목을 졸랐다. 당시 확장 일로였던 국제의 부채비율은 924%로 높았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국제에 더 이상 자금지원이 곤란하다”는 게 주거래은행의 발표였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잘 없었다. 세인들은 권력에 밉보인 결과로 받아들였다.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이 드물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국제의 높은 부채비율이 기업 길들이기에 나선 권력에 좋은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됐다.

1987년 양정모는 '국제그룹 복원본부'를 발족시켜 회사 되찾기 운동을 벌였다. 88년 10월 국회도 국정감사를 통해 재무부·은행감독원·제일은행 등으로부터 국제 정리 자료를 제출받아 해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쳤다. 이에 힘입어 양정모는 89년 2월 공권력 행사로 인한 재산권 침해에 대한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7년여 송사 끝에 93년 7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일단 명예는 회복한 셈이 됐다.

이어 양 회장은 한일합섬을 상대로 자신의 주식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는 등 10년이 넘도록 회사 찾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96년 “개인이 맺은 계약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대법원 최종심에서 패소했다. 모든 주식 지분과 계열사가 다른 회사에 합병 또는 흡수된 뒤라 그룹 복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국제상사는 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2006년 LS그룹 계열사 ㈜E1에 넘어가 ㈜LS네트웍스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정모는 한을 다 풀지 못한 채 2009년 3월 29일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국제그룹은 1947년 양정모가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웠던 고무신 생산업체 국제고무공장사(이듬해 국제화학주식회사로 개명)에서 출발했다. 부드럽고 질기며 모양도 좋았던 ‘왕자표 고무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마침내 국제를 1위 신발업체로 만들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60년 3월 공장에 큰불이 나 62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대형사고가 났다.

국제그룹은 1980년대 초반까지 재계 7위로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중 하나였다. 신발산업을 일으켜 세계 무대를 누볐다. 사진은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국제그룹 전시관의 모습이다.  전시관 규모가 현대와 버금갈 정도로 국제그룹의 수출역량은 대단했다.하지만 권력 앞에는 초라했다. 정치자금을 조금내고 그것도 어음으로 줘서 그룹이 망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진=나무위키.
국제그룹은 1980년대 초반까지 재계 7위로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중 하나였다. 신발산업을 일으켜 세계 무대를 누볐다. 사진은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국제그룹 전시관의 모습이다. 전시관 규모가 현대와 버금갈 정도로 국제그룹의 수출역량은 대단했다.하지만 권력 앞에는 초라했다. 정치자금을 조금내고 그것도 어음으로 줘서 그룹이 망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진=나무위키.

업계에선 다들 국제가 망한다고 했지만 국제는 아이템을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꾸어 재기에 성공한다. 62년 국내 최초로 미국에 농구화를 수출했고 73년엔 사명을 국제상사로 바꾸었다. 75년 종합상사 지정도 받았다. 1981년엔 그 유명한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PRO-SPECS)’를 선보이며 기염을 토했다.

국제는 70년대 들어 중화학과 섬유, 건설 분야에도 진출해 성창섬유·국제상선·신동제지·동해투자금융 등을 세웠다. 77년엔 부산 최대 철강업체 연합철강과 그 계열사 연합물산·연합개발· 연합해운 등을 인수해 사세를 대폭 확장했다. 80년 양정모는 국제그룹을 세우고 회장에 취임했다.

5공 전두환 정권에게 양정모 회장이 밉보인 저간의 정황은 5공 청문회나 국정감사, 재판 과정 등을 통해 거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시 세간에는 “2·12 총선 당시 부산상의 회장이었던 양정모의 협조가 부족해 밉보였다” “일해재단에 정치자금을 쥐꼬리만큼 내서 찍혔다” “양정모의 부인(김명자)도 영부인 이순자 여사의 눈 밖에 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파다했었다. 당시 일해재단 정치자금 헌납 규모는 현대 정주영 51억 원, 삼성 이건희 45억 원, 포항제철 박태준 40억 원등이었다. 양정모는 7위 그룹이면서도 5억 원을 그것도 어음으로 냈다가 화를 입었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나돌았다.

평소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던 그는 한 푼 두 푼을 아끼며 기업 키우기에만 외골수로 매달리다 권력의 입맛을 맞혀주지 못해 회복하지 못할 화를 입고 말았다. 그룹 해체로 국제상사 건설부문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으로 넘어갔다. 또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에, 나머지 계열사는 한일그룹에 각각 인수됐다. 국제토건과 성신토건은 청산됐다.

양정모의 한(恨)은 권력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한국 기업들의 태생적 한계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대기업일지라도 권력에 밉보일 경우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 케이스이기도 하다. 국제와 같이 비교할 순 없지만 권력(또는 여론)에 의한 기업 길들이기 역사는 시대가 달라진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보인다.

작금의 적폐청산 과정에서 기업들은 여전히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 최근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석연찮게 유명을 달리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권력이나 여론은 기업과 영원히 적대 또는 갈등 관계인가. 권력의 눈치를 한껏 보며 자라온 한국 기업과 기업인의 공과(功過)에 대해 이후 역사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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