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은 유공인수 때와 다름없이 당시 2,000여 명의 직원 재교육 시키며 모두 품에 안아

1993년 12월, 정부는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방식을 발표했다.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하되 컨소시엄 구성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아울러 한국이동통신에 대한 민영화 추진도 함께 발표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종현은 또 한 번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전경련 회장사인 선경이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내면 불공정이나 특혜에 대한 의혹이 발생하는 등 재계의 화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최종현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기로 했으며 전경련 회장단은 그의 대승적 결정을 일제히 환영했다.
대신 최종현은 한국이동통신 인수 경쟁 입찰에 참여했다. 그런데 선경그룹의 참여 소식이 알려지자 5만 원대의 주식이 60일 이상 고공행진을 하며 공개입찰 시점에선 30만 원 가까이 올랐다. 인수를 검토하던 임직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나 최종현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약 12% 더 높은 가격으로 주식 23%를 전격 인수했다. 선경그룹의 미래 사업에 대한 최종현의 꿈이 우여곡절 끝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너무 높은 가격에 사는 게 아니냐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2,000억 원을 더 주고 사는 것은 나중 일을 생각하면 싸게 사는 겁니다. 우리가 이동통신사업을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나요. 회사 가치는 더욱 키워가면 됩니다. 우리는 미래를 산 겁니다."
한국이동통신(現 SK텔레콤) 출범 때에도 최종현은 유공 때와 다름없이 당시 2,000여 명의 직원 중 누구도 해고하지 않고 재교육화 훈련을 시키며 모두를 품에 안았다.
이후 안정을 찾은 한국이동통신은 곧이어 '단군 이래 가장 큰소리칠 만한 기술'이라고 평가 받는 부호분할다중접속(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CDMA) 세계 최초 상용화에 전념하게 된다.
디지털 주파수 송수신 방식 가운데 하나인 CDMA는 아날로그 방식보다 10배 이상 수용용량이 큰 장점이 있었으나, 기술 구현 자체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위험부담도 있었다. 반면 상용화에 성공하면 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이었다.

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조건에 CDMA 방식 채택을 못 박았다. 이후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선경의 미래는 CDMA 기술 개발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종현은 CDMA 개발의 사령탑으로 영입한 서정욱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1995년 한국이동통신 사장에 취임한 서정욱은 제의를 수락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60년대 말 다른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해외에서 폴리에스터를 수입해 판매하는 것과는 달리 자체 개발에 진력하는 최종현 회장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 최종현 회장 한 사람만 보고 그의 비전에 동참키로 했고 지금도 그 결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워낙 투자 규모가 큰 분야였지만 최종현은 보고만 받을 뿐 관련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 그저 주변에 "잘 도와주라."라는 말만 한 것이 전부였다.
최종현의 과감한 투자와 신뢰 경영에 힘입어 CDMA 기술 개발은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한 대장정의 또 다른 신화였다. 1996년 1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하며 SK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