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 스위프트는 선동죄나 명예훼손죄 피하기 위해 기행문 형식으로 저술

육당 최남선은 홍명희,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문인이자 학자다. 친일 행적을 둘러싸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한국 근대사, 특히 문화 방면에 끼친 그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그 최남선이 영국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한국어로 처음 번역한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일본의 아동용 문고본을 중역한 것이었지만 소인국은 '알사람 이야기', 대인국은 '왕사람 이야기'로 옮기는 등 순한글 문체를 사용했으니 요즘 기준으로도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한데 문제는 원작의 정수(精髓)를 쏙 빼놓은 일본어판 『걸리버 여행기』를 저본으로 삼은 탓에 스위프트가 당초 의도했던 사회 비판은 모두 사라지고 단순히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원작자 스위프트는 당대 영국의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었으나 선동죄나 명예훼손죄를 피하기 위해 여행기 형식을 취한 것이 『걸리버 여행기』였다. 때문에 작가 이름도 가명을 썼으며 출판업자에게도 출간 전에 먼저 변호사와 상의하라 충고했을 정도였다.
본래 『걸리버 여행기』에는 소인국, 거인국 외에 '말들의 나라 휴이넘',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 여행기도 있으며 이 두 나라 편에서 풍자와 비판이 특히 빛을 발한다. 그런데 일본어판이나 이를 다시 옮긴 최남선 판에선 거인국과 소인국 이야기만 남았다. 그마저도 날카로운 비판, 이를테면 이런 구절은 삭제된 채였다.
"그들은 국회의원의 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나라(영국)에서는 온통 법을 악용하고 왜곡하며 회피하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법이 가장 잘 해석되거나 적용된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려주었습니다."
이건 거인국 왕이 걸리버에게서 영국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소감인데 아동용 판에선 빠졌다.
인간이 '야후'라는 야만족 취급을 받으며 말 종족에게 사육되는 휴이넘 여행기편에는 더욱 신랄한 풍자와 비판이 나오는데 아동용에선 휴이넘 여행기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그러니 "장관이 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공공 집회에서 궁중이 비리에 대해 열성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현명한 국왕은 그런 사람을 고용한다. 그런 정열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국왕의 생각에 가장 잘 순종하니까" 같은 구절을 만나기는 더더욱 가망이 없을 수밖에.
이건 근현대 우리나라 검열사를 다룬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한만수 지음, 개마고원)에서 만난 내용이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째 당의정을 씌운 아동용이 아니라 스위프트의 온전한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싶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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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