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이프도 시행착오 끝 1980년 12월 미국•독일•일본에 이어 세계 4번째로 개가 올려

1977년 4월 선경화학은 마침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9월에는 완제품 시험에도 성공해 10월 연간 생산량 900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필름 생산 공장 건설에 착공했다.
그해 12월 첫 시제품을 생산하던 날, 최종현은 직원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날의 감격은 잠시였다. 선경화학의 기술 개발 정보를 입수한 데이진이 재빨리 한국의 제일합섬과 기술 공여 계약을 맺었다. 만약 제일합섬의 기술 도입이 실현된다면, 선경화학의 필름 개발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소식을 접한 최종현은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 과정과 성공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고 정부에 국내 독자 개발 기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정부는 선경에 1년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품질을 검사하기로 결정했다. 또다시 각고의 1년이 이어졌다. 최고의 품질을 지닌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시간이었다.
1978년 10월, 과학기술처는 선경화학이 개발한 폴리에스터 필름 제조 기술을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국산 신기술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선경화학의 폴리에스터 필름은 향후 4년간 기술 보호 조치를 받게 되었다. 최종현은 훗날 이때를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로 손꼽기도 했다. 국내에서 기술 독점권을 인정받은 폴리에스터 필름은 선경그룹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에 성공한 선경화학은 비디오테이프로 눈길을 돌렸다. 이 또한 폴리에스터 필름 못지않은 시행착오와 좌절 끝에 착수한 지 5년 만인 1980년 12월 마침내 개발에 성공했다. 컬러 비디오테이프 개발은 미국•독일•일본에 이은 세계 4번째의 개가였다.
선경화학 비디오테이프는 해외 시장에서의 좋은 반응에 힘입어 1981년 3월 국내 시판에 들어갔으며, 이후 1984년 연간 2,400만 개를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생산 공장을 갖추었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부단히 기술을 개발해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이것은 한국 기업가로서 최종현이 평생 품었던 사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은 언제나 그에게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은 그 시작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