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은 철저하게 기획과 계획을 중시…부사장 취임후 10년간 설비 증설에 전력

쌍두마차. 1962년 11월 최종현이 선경직물에 합류한 뒤, 사람들은 실전에 강한 저돌적인 사업가인 형과 경제학 이론으로 무장한 지략가인 동생의 이상적인 형제 경영을 그렇게 '쌍두마차'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최종현은 사업에 있어 철저하게 기획과 계획을 중시했다. 그는 부사장 취임 이후 우선 10년간 설비 증설에 전력을 다하느라 심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자금 회전의 숨통을 틔우는 데 주력했다.

미국 정부가 매년 한국에 원조해 주던 '원사 수입불'(원사 수입 전용 달러)을 향후 없앨 뿐 아니라 이듬해 마지막으로 직전 해의 50%만 책정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악재를 호재로 삼는다는 계획 아래 곧바로 수입불 매집에 착수했다.
국내 원사 수입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수입불을 적절한 가격에 사들였을 뿐 아니라, 정부 입찰에 참여해 수입불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낙찰받은 것이다. 1963년 직물업계는 원사 대란으로 곤욕을 치렀지만, 선경직물은 미리 확보해둔 수입불로 실적 호조와 함께 악성 부채를 단번에 갚을 수 있었다.

원사 공장 건립은 형인 최종건이 오래전부터 결심한 계획이었다. 최종현은 1965년 틈새를 파고든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 계획을 실현했다.
국제적인 대세를 이룬 폴리에스터 대신 이미 사양 사업으로 접어든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생산기술을 이전 받기 위한 기술회의에서 일본 데이진 측은 최종현의 계획에 의구심을 품었다. 데이진은 당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 최고의 섬유 기업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왜 선경은 이미 국제적으로 사양길에 들어선 아세테이트 공장을 지으려 하는가?"였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폴리에스터 공장이다. 그러나 귀사가 제조 기술을 내놓으려 하지 않고, 한국에서 건설 허가가 쉽지 않아 우선 폴리에스터로 가기 위한 디딤돌로 선택한 것이다. 또한 아세테이트가 사양 산업이지만 한국에는 아직 1,000만 달러의 인견사 시장이 있다. 선경이 공장을 짓는다면 독점 사업이 될 텐데, 독점 기업이 망한 예를 보았는가?"
회의는 5분 만에 끝났다. 데이진의 이나가키 전무는 최종현에 대해 '모노와카리', 즉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 평하며 최대한 지원을 약속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