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표 안감의 품질은 인정 하면서도 '후진국 한국의 제품'에 싸늘한 반응
차라리 'made in Japan' 권유받기도…홍콩서 '수입 의사' 낭보 들어와

박정희 의장이 찾아온 건 1961년 9월 어느 날이었다. '5ㆍ16' 이후 기업인 대상의 부정축재 처리법 관련 조사로 경제계 사정이 말이 아니던 때였다.
당연히 최종건은 부정 축재자 명단에 들지 않았지만, 원사 수입의 감축과 경제 위축으로 원사를 구하지 못해 대책을 궁리하던 중에 방문 소식을 들은 것이다.
박정희의 깜짝 방문에 놀랐지만, 최종건은 애써 마음을 추슬러 인사했다. 시찰을 마치고서야 그가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정희는 닭표 안감과 봉황새 이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폐허가 된 공장에서 기계를 고쳐가며 사업을 일으킨 양심적인 기업인이 이끄는 모범 기업이라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둘러보며 박정희는 최종건의 열정적인 기업가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는 우리나라 직물 기술과 국산 직물의 국제 경쟁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최종건은 한국의 직물 기술은 결코 선진국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최신식 직기가 들어 온다면 선진국 못지않은 옷감을 짜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가만히 대답을 듣던 박정희는 "앞으로 수출을 하도록 노력해 보시오."라는 한마디로 최종건을 격려했다.
박정희가 다녀간 후 최종건은 수출을 결심했다. 사실 당시 상황으로 수출에 뛰어드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서울 연락사무소를 넓은 곳으로 옮기고, 수출업무를 전담하는 업무과를 신설했으며, 수출업무를 위한 인력을 새로 배치했다.
수출은 맨땅에 헤딩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국 기업과 연결된 작은 인연 하나 없는 상태였다. 선경직물은 우선 을지로에 있는 이토추상사 한국 지사에서 홍콩 무역 회사 리스트를 얻어 닭표 안감 견본과 거래 요청서를 띄우면서 본격적으로 무역상들을 찾아다녔다.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닭표 안감의 품질은 인정하지만, 아직 후진국인 대한민국의 제품이 외국에 먹히기 쉽지 않다는 답이었다. 차라리 'made in Japan'으로 상표를 만들어 일제인척 수출을 해보라는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듣기도 했다.
수출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높고 험했다. 도무지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때 마다 최종건은 직원들을 격려하고 때로는 질책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했다.
"이 세상에 처음부터 잘되는 일이 어디 있나? 처음 가는 길은 풀도 많고 돌도 많아 걸려 넘어지기 쉽지만, 한 번 길을 잘 닦아 놓으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달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닭표 안감 견본을 보냈던 홍콩에서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홍콩 광흥공사에서 후공정이 필요 없는 닭표 안감의 품질에 호의를 보이며 수입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온 것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품질은 훌륭하지만 일제 안감에 비해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져 거래하려면 가격을 크게 낮춰야 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