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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⑯원자폭탄과 日영화감독(1)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⑯원자폭탄과 日영화감독(1)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11.0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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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구로사와 감독의 원폭관련 영화 몇편서 보여준 그의 역사관에 아쉬움
이데올로기나 프레임에 갇혀 … '일본=원폭 피해자'란 인식 단계별로 진화

구로사와 아키라. 일본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 끼친 공헌이 워낙 큰 인물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이름 앞에는 늘 '거장(巨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아닌 게 아니라 <라쇼몽>이나 <란> 등 그가 만든 사무라이 영화들은 일반 관객뿐 아니라 영화인들조차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원폭' 관련 영화는 어떨까? 그것도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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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일까? 아니,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까? 상당한 논란거리다. 이는 그저 일상 속 대화거리나 과거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지난 2023년 5월 일본 히로시마(広島)에서 주요 7개국(G7) 회의가 열렸을 때도 이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 회의 첫 일정이 19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원폭 자료관 방문이었다. 이때도 '일본=원폭 피해자'라는 주장이 나왔다. 물론 많은 이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날 의장국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피폭의 실상을 전하는 것은 핵 군축을 향한 모든 노력의 시작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그 의의를 말했다. 물론 이 말 안에는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 원폭의 피해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럼 가해자는 누굴까? 당연히 미국이 된다. 하지만, 이 역시 당연하게도, 미국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참석했던 미국의 대통령 조 바이든(Joe Biden)은 별 내색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 구로사와, "일본은 원폭 피해자"

'일본=원폭 피해자'라는 논리는 매우 중요하다. '원폭' 개념이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전체를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대나 강제징용 등에 대한 한국의 주장도 자칫 힘을 잃을 수 있다. 암묵적으로 이 논리는 "너네만 피해자냐, 우리도 피해자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허위논리'로서의 '이데올로기'이며 '프레임(Fram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영화에도 이 같은 이데올로기나 프레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그래서 늘 '거장(巨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이 그 대표자라면 믿을 수 있을까? 확실히 <라쇼몽(羅生門)>(1950)이나 <란(乱)>(1985) 등 그의 사무라이 영화들은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원폭' 관련 영화는 어떨까? 그것도 그럴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을 것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1950년 마흔의 젊은 나이에 '라쇼몽'을 제작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 거장으로 떠오른다.
구로사와 감독은, 1950년 마흔의 젊은 나이에 '라쇼몽'을 제작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 거장으로 떠오른다.

원폭과 관련된 몇 편의 그의 영화는 안타깝다. 그가 보여준 역사관이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수식어와 어울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어 보인다. 그저 현상에만 매달리는 것 같다. 물론 그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그 '현상A'는,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모든 논리의 시작점인 공리(公理, axiom)가 된다. 즉, '현상A'는 모든 논리의 대전제가 되는 것이다. 논리의 건축가는 그 '현상A'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그것은 그가 쌓아 올리는 모든 논리의 집, 모든 인과관계의 '바탕'인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 '공리'가 잘못된 것이라면? 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공리'를 오직 한 가지로만 해석하는 것이라면? 이때의 '공리'는 '공허한 억지'가 되며 그를 기초로 이뤄지는 모든 인과관계, 즉 논리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를 '과학'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인과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사건A'는 왜 일어났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따져야 한다. 이런 시각이라면, 인과관계에 대한 해석 없이, 하나의 '현상'에만 매달리는 역사관은 '천박'하다. 또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을 오직 한 가지로만 받아들이라는 역사관은 '억지'다.

그렇다면 구로사와 감독의 역사관은 천박한가? 억지인가? 욕먹을 각오로 말한다면, 그렇다. 최소한 '역사=과학'으로 접근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구로사와 감독의 역사관은 천박하다"는 주장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놀라운 영화언어와 권위가 그 같은 비판을 막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는 '천박한 역사관'이 미사여구의 '탁월한 영화언어'와 한 몸이 될 때의 위험성을 알린다. 또한 '탁월한 영화언어'는 '천박한 역사관'을 감추는 '화려한 포장지'가 될 수 있음을 알린다.

1955년 제작된 구로사와 감독의 첫 원폭 영화 '살아있는 것의 기록'.
1955년 제작된 구로사와 감독의 첫 원폭 영화 '살아있는 것의 기록'.

우선 구로사와 감독의 삶을 간단히 알아보자. 그는 1910년 3월 23일생이다. 태어난 지 5개월 뒤 일본은 조선을 병합(倂合)했고 1년 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터진다. 10대 청소년기에 1920년대의 경제위기나 관동대지진을 겪었고, 만주사변이나 중일전쟁 등 1930년대의 동아시아 위기는 성인이 된 후 체험한다. 1945년 8월 그의 조국 일본이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것은 그의 나이 30대 중반 때였다. 1943년 데뷔한 2년 차 영화감독에게 수십만 명의 시민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 간 원폭은 엄청난 충격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원폭 영화는 일찍 시작해 오래 간다. 그의 원폭 관련 첫 작품은 1955년 개봉된 <살아 있는 것의 기록(生きものの記録)>이다. 그리고 35년이 지나 그가 노년에 접어든 1991년과 1992년 연 이어 두 편의 원폭 영화를 발표한다. 1990년 <꿈(夢)>과 1991년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이 그들이다. 그가 유명을 달리한 것은 1998년. 이 두 편의 영화는 그의 말년 작이라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결국 원폭에 대한 그의 인식은 평생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구로사와 감독이 만든 세 편의 원폭 영화, 즉 <살아 있는 것의 기록>과 <꿈>, 그리고 <8월의 광시곡>의 저변에는 하나의 공통된 인식이 깔려 있다. '일본=원폭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인식은, 세 편의 영화 모두에서, 한꺼번에, 또는 매회 동일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일본=원폭 피해자'라는 그의 인식은 단계별로 진화한다. 필자는 그것을 세 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1단계를 보자. 이는 '공포'의 단계라 할만하다. 1955년 발표한 그의 첫 원폭 영화 <살아 있는 것의 기록>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카지마 기이치(中島喜一)는 주물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다. 어느 날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원자폭탄(또는 수소폭탄)으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의 '공포'는 단순한 '공포'에서 맘추지 않는다. 그는 이 '공포'를 넘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짠다. 원폭으로부터 안전한 브라질로 이민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포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브라질 이민'은 단순하게 말과 전략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다. 재산까지 처분하려 한다. 그러자 가족이 참지 못한다.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것. 우선 가족은 그를 한정치산자로 청구, 법원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그리고 인정을 받는다. 그러자 그는 재산 때문에 가족이 이민을 반대한다고 생각해 공장을 방화한다.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정신병원에 갇힌 그는 안도한다. 자신이 지구 밖 다른 행성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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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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