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한 때 신도시 화성 이주 주민에게 인삼판매 특권부여 검토해

우리나라는 '인삼의 종주국'이라 자처한다. 동북아에서 일찍부터 고려 인삼이 신령스런 약초로 이름을 떨쳤으니 당연하다.
한데 인삼은 단순히 약효가 뛰어난 약초가 아니었다. 한국사를 살펴보면 때로는 외교의 수단, 때로는 대표적 무역상품 그리고 국가재정의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했던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삼에 관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은 『작지만 큰 한국사, 인삼』(이철성 지음, 푸른역사)를 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18세기 조선의 중흥을 이끈 정조는 대표적인 개혁군주로 꼽힌다. 그런 그가 전력을 다해 추진한 것이 있었으니 수원 화성 건설이었다.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라"는 비전을 가지고 추진한 화성은 정조가 꿈꾼 이상적 신도시였다. 그랬기에 정조는 땅 값을 주고 토지를 수용했고, 궁궐 공사에 동원된 인부에게 임금을 주고 당대의 신기술을 적용했다. 이렇게 1796년 완공된 화성은 규모도 컸거니와 바로 앞에 삼남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를 개통하고 상가를 배치하는 등 도시 환경도 나름 신경썼다.
하지만 건물은 건물, 그것만으로 신도시가 번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모여들 민생대책이 필요했다. 이때 선혜청 당상이던 정민시란 이가 나섰다. 그는 수원으로 이주하는 서울 부자들에게, 가삼(家蔘) 무역과 모자 판매권을 주자고 제안했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큰길 남북으로 기와집을 짓도록 하고, 장사 밑천을 빌려 주어 무역하게 하되 그 이자를 받아 화성 수리비용으로 충당하자고 했다. 이는 당시 대청 무역에서 아주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던 특권을 제공해 신도시 번영의 씨앗을 심으려는 의도였다.
이는 수원으로 이주하는 한양의 부실호(富實戶) 20호에게 미삼계(尾蔘契)를 조직하도록 해서 인삼 판매의 특권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한 〈화성부내신접부실호삼모구획절목華城府內新接富實戶蔘帽區劃節目〉으로 정리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판중추부사 이병모 등이 수원에 이주하는 부호들에게 국가가 이익 독점권을 주는 거라며 강력 반대한 데 따른 결과였다. 반대론자들은 화성 이주를 막을 필요는 없으나 조정이 이주민을 모집하는 것이나, 농사가 아니라 모자와 가삼을 근본으로 삼아 민을 부유하게 하는 것, 또 서울에서 들어간 객이 수원의 재물과 권세를 틀어쥐게 되니 이는 주객을 바꾸는 것 등은 잘못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조는 이 반대론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몸을 보하는 신령한 약재로만 알고 있는 인삼, 그리고 인삼 판매권이 한때는 국가정책을 좌우할 정도여서 말 그대로 작지만 큰 요인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