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14:25 (화)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⑥수출 산업과 농촌의 피폐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⑥수출 산업과 농촌의 피폐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2.13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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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 도입의 부작용…1929년 20억 엔이었던 수출액은 1931년 11억 엔으로 반 토막
1930년 실업자 성인 인구의 10%인 250만명 달해…농산물값 폭락으로 농촌경제 쑥대밭
전체농가 40%인 양잠 산업엔 사형선고…쌀값 60%가까이 떨어지고 과일은 76.8% 폭락

일본에게 1920년대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대였다. 1920년 전후공황, 1923년 대지진에 의한 진재공황, 1927년 은행권 붕괴에 따른 쇼와금융공황 등 공황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1929년 일본은 금본위제를 도입한다. 금본위제 도입은 긴축경제를 의미한다. 심각한 불황 상황에서의 긴축경제. 이것이 1920년대 일본경제를 친 최후의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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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이 모든 것(Timing is Everything)'이란 말이 있다. 보통은 삶에서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쓴다. 하지만 역사에도 이 말은 꼭 들어맞는 것 같다.

타이밍이 진짜 중요하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어떤 결정을 했나'도 중요하지만 '언제 했나' 또한 중요하다는 얘기다. 때로는 '어떤' 보다 '언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니 '타이밍이 역사의 모든 것(Timing is Everything in History)'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29년 일본이 금본위제 도입을 위해 실시한 '금해금(金解禁)' 즉, '금 수출에 대한 규제 폐지'는 그야말로 역사에서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1929년 7월 출범한 하마구치 내각(浜口內閣)이 금해금을 천명한 것은 같은 해 11월 21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0년 1월 11일 전격적으로 금해금을 단행한다. 이로써 일본은 본격적으로 세계 금본위체제에 동참하며 일본이 '세계 5대 열강'의 지위에 걸 맞는 나라임을 만천하에 과시한다.

이 같은 일본의 '금해금'은, 그야말로,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세계대공황을 촉발시킨 미국의 주가 폭락의 시작이 언제인가?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로 유명한 1929년 10월 24일이다. 이날 오전에만 주가가 11%나 빠지며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로써 10년 넘게 이어지는 세계 대공황의 시작을 알린다. 일본이 세계를 대상으로 금해금을 선포한 것이 11월 21일이라 했다. 대공황 개시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금해금이 실제로 시행된 때는 1930년 1월 11일이니 대공황이 시작되고 넉 달이 채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1930년 일자리를 구하려는 실업자 행렬.
1930년 일자리를 구하려는 실업자 행렬.

일본의 20년대는 괴로웠다. 전후(戰後)공황(1920년), 진재(震災)공황(1923년), 쇼와금융공황. 경제를 살려야 했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쏟아 부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금해금을 단행한다.

금본위제에 동참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곧 긴축정책을 편 효과를 가져 온다. 한 마디로 '거꾸로 정책'을 폈던 것이다. 자칫 나라경제가 절단날 수도 있는 위험한 정책이었다. 일본 정부는 왜 이 위험한 상황에서 이 위험한 정책을 폈을까?

■ 환투기꾼들의 잔치된 금해금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그 이유를 따졌다. 그리고 두 가지를 지적했다. ➀금본위제가 세계의 흐름이었다는 점과 ➁'세계 5대 열강'으로서의 일본이 자기역할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일본이 '불황 속 긴축'을 의미하는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주가 폭락 당시의 세계 및 일본경제에 대한 오판이었다. 잘못된 상황 파악은 자칫 나라를 파멸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 일본의 금해금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는 미국의 주가폭락과 그 충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주가 폭락이야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1920년대 일본은 이미 수차례 그걸 겪었다. 1927년 한 해 동안 일본은 금융 시스템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뱅크런'을 두 차례 경험한 바 있다. 국내 경제에 대한 오판도 중요했다. 일본 정부도 '불황 속 긴축'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오히려 '기회'로 여겼다. '불황 속 긴축'으로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고 이로써 경제의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봤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금본위제 도입은 잘못된 정책이었다. 세계경제 및 일본경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드러난 문제는 외환시장의 불안이었다. 외환시장의 안정이야말로 사실 금본위제 도입의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이는 통화가 금에 연동돼 있다는 사실 덕이었다. 하지만 1929년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금 수출 규제를 풀자 엔화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만다. 환투기꾼들이 가세한 시장 참여자들이 대거 엔화를 팔고 금을 사들였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금 태환 비율을 1엔 당 0.75g으로 규정한다. 전쟁 전 수준을 고수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달러와 비교했을 때 100엔 당 49.85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잘못된 것이었다. 20세기 들어 엔화 유통량이 더 많아졌음을 간과한 결정이었다. 금 수출 규제 해제 직전 환율은 100엔 당 44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환투기꾼들은 엔화를 팔고 달러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일본의 금을 빼내갔다. 결과는 혹독했다. 수출 규제를 풀었던 1930년 1월부터 6개월 사이 일본에서는 2억3000만 엔의 금이 유출되고 만다. 이는 그해 예산의 10%에 이른 막대한 양이었다.

기업으로서는 2중, 3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금본위제는 긴축재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정부 스스로 국채 발행과 예산을 줄였다. 자국 통화의 높은 가치를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례 얘기했듯 1920년대 일본은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리던 때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터진 대공황의 여파로 수출이 어려웠다. 일본도 이른바 '대공황' 국면에 진입했던 것이다. 기업의 파산과 실업의 증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무엇보다 수출이 문제였다. 생사(生絲)나 면사(綿絲), 쌀 등 주요 농산물과 철강재나 시멘트 등 주요 수출산업이 초토화됐다. 1929년 20억 엔이었던 수출액은 1931년 11억 엔으로 반 토막이 났다. 당연히 주가도 떨어졌다. 1930년 도쿄주가는 1929년에 비해 40% 가까이 빠졌다. 주요 수출 관련 산업의 주가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무려 40% 이상 빠졌던 것이다.

쇼와공황으로 피폐해진 일본 농촌의 아이들.
쇼와공황으로 피폐해진 일본 농촌의 아이들.

당연히 성장도 문제가 됐다. 전쟁특수로 고성장을 달성했던 1914~19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달성했던 성장률은 6.2%였다. 경이로운 성장세였다.

하지만 1920년대는 달랐다. 1920~29년 성장률은 겨우 1.8%에 멈췄던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 직후인 1930~31년 다시 성장률은 0.7%로 가라앉았다.

실업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 1930년 실업자 수는 성인 인구의 10% 수준인 250만 명에 이른다. 민영공장노동자수는 1929년 1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30년에는 90.0, 1931년에는 87.3, 1932년에는 82.0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농촌이 받은 피해만큼 크지는 않았다. 일본 내 만성적인 불황에 미국발 대공황, 그리고 여기에 대해 일본의 금본위제 도입은 농촌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고 만다. 무엇보다 농산물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이 문제였다. 1929년을 100으로 할 때 1931년 쌀은 57.6%, 보리는 57.2%, 누에고치는 42.1%, 과일은 76.8%로 폭락한다. 9개 주요 품목 전체적으로는 100에서 56.7%로 거의 반 토막 난 수준이다.

누에고치 가격의 폭락은 특히 농가경제의 파탄을 가져온 주범이다. 누에고치는, 당시 일본 최대 수출품인 생사(生絲)의 원료다. 주로 미국에 수출되던 생사는 1927~29년 3년 평균 일본 전체 수출액의 36.6%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산 가구 수도 엄청났다. 1929년 당시 전체 농가 호수의 약 40%가 되는 221만호가 양잠업에 종사하고 있었을 정도다. 종사자 수는 무려 1300만 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된다.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가격이 반 토막 남으로써 농가경제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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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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