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안지 추가로 거뒀다가 시험관은 파직되고 합격자 16명 모두 합격 취소도

며칠 전 수능시험이 치러졌다. 수험생들과 그 부모들은 가슴을 졸였겠지만 올해는 비교적 평온했다. 날씨도 그랬고, 출제 시비도 없었고, 굵직한 사회적 이슈가 많아 언론의 여력이 없었는지 예년에 비해 우여곡절을 겪은 수험생 관련 소식도 드물었다. 무엇보다 부정행위에 관한 뉴스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한데 시험이 치러지면 편법으로 통과하려는 부정행위는 있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랬으니 조선 시대에는 부정행위로 인해 아예 과거 시험 자체를 무효로 처리한 경우까지 있었다. 숙종 때 일이다. 학자 이동표(李東標)는 기막힌 일을 겪었다. 1675년 진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문과 증광시 초시에 합격한 후 그다음에 상경해 복시를 치렀다. 한데 이 시험에서 나주목사 윤이익 등 10여 명이 대리시험 등 부정행위를 저지르다 발각됐다. 이 일로 시험 처리가 지연되다가 한 달여 시간이 흐른 후 초시와 복시 모두 파방(罷榜) 처리되는 바람에 애꿎게 이동표의 합격 자체가 날아가 버렸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출세의 필수 코스였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어 갈수록 부정행위가 판쳤다. 그 결과 부정행위를 한 개인에 대한 응징을 넘어선 단체 처벌이랄 수 있는 파방도 기록에 심심찮게 보인다. 예를 들면 1626년(인조 4) 별시에서는 답안지 회수가 모두 끝난 뒤에 55장의 답안지를 추가로 거두어들였다는 이유로 시험관이 파직되고 합격자 16명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기도 했다.
물론 부정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는 정거(停擧)라 해서 다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고, 합격 후라도 부정행위가 삭과(削科)라 해서 급제를 취소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이런 엄벌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면해줘 다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임원준이란 이는 1444년(세종 26) 생원시험 때 남의 글을 베껴 쓰다가 적발되어 정거처분을 받은 후 재응시 기회를 얻기 위해 임금에게 반성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안간힘을 쓴 결과 세조 즉위 후 사면을 받아 1456년 문과 식년시에서 장원급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아, 당시 조정에서도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응시자의 신상을 적은 부분을 가리도록 한 봉미(封彌)법, 답안지를 서리가 붉은 글자로 다시 쓰게 해 이 사본으로 채점하게 한 역서(易書)법이 그것이다. 모두 응시자의 신원을 알게 되어 채점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런 내용은 과거 관련 논문을 엮은 『선비의 답안지』(김학수 외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에서 만날 수 있는데, 부정행위 방지 방안이나 처벌 방안이 법제화 되어 있는 걸 보면 역시 시험 부정행위는 그 뿌리가 오래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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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