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상 기세는 웅장하고 다채로워 석조예술의 금자탑으로 꼽혀

쉔콩쓰 참관을 마치고 다시 택시로 80여km 떨어진 윈깡석굴로 갔다. 윈깡석굴은 중국을 대표하는 국내외에 이름높은 관광지이기도 하다. 석굴의 초입은 아마도 최근에 지어진 듯한 새 건축물이 들어서 있고, 이것이 비싼 입장료를 예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매표소에서 지하로 들어가 처음 발길이 닿은 곳은 작은 호수 가운데 세워진 절이었다. 새로 지은 이 절은 전체적으로 중국 여러 곳에서 본 유명 고찰의 기본배치를 그대로 따온 것으로 특징적인 것은 주요 불당의 불상이 주로 목조불상이었다는 점이다. 절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윈깡석굴로 이어진다. 석굴은 우저우산 남쪽 산록에 자리잡고 있으며, 암산을 개착하여 만들어졌고 동서간에 길이가 1km쯤 된다. 주요석굴은 45개, 조그맣게 바위를 캐내고 만든 감실 252개 그리고 석조 불상 등 조상이 51,000여개에 이르는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대 석굴군의 하나라고 자료는 설명하고 있다. 이 석굴은 돈황의 막고굴, 낙양의 용문석굴과 챈수이 맥적산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석굴이 처음 조성된 것은 북위 시기로 문성제 즉위 첫해 ( 460년 ) 부터이고 석굴 조성사업은 효명제 우광 5년 ( 524년)까지 이어졌다. 이후 동위, 북제, 수 및 당대까지 연면히 이어져왔다.

제1, 제2굴은 이를 합쳐 쌍굴이라고 부르며 윈깡석굴의 동단에 있다. 제1굴의 가운데 2층 방형의 탑기둥이 조각되어 있고, 뒷 벽에는 미륵불상이 있고 4벽면의 불상은 대부분이 풍화침식되었다.

남벽 굴문의 양측에는 유마, 문수가 새겨져 있고 동벽 뒷부분 아래에는 부처의 출생 관련 에피소드에 대한 부조가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어있다. 제3굴은 운강석굴의 가장 큰 석굴로 전면의 벽면 높이가 25m에 이르고 본존 좌불상은 높이가 10m, 양측의 보살입상은 각각 6.2m의 높이다. 세 불상의 조각기법과 양식으로 미뤄봐 당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5굴은 운강석굴의 가장 중심 위치로 6굴과 1조를 이룬 쌍굴로, 이굴은 전후실로 구분되고 후실 북벽의 주된 조각상은 3세불로 중앙의 좌불은 높이가 17m로 운강석굴의 최대석불이다. 이들 2개 굴의 앞부분에는 5칸 4층의 누각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청 초기 순치 8년 ( 1651년 ) 중건된 것이다. 제6굴은 굴 평면이 방형에 가깝고 가운데는 굴이 천정과 연결되는 2층 방형의 15m 탑주가 있다. 탑주 4변의 대감실과 굴의 동, 남, 서의 3벽 일대에는 33폭의 석가모니가 탄생하고 득도한 일련의 과정을 새긴 부조가 펼쳐져 있다.

이굴은 규모가 웅장하고 조각 장식이 더할 수 없이 화려하며 기법도 세련되었다. 흔히 윈깡석굴의 가장 대표적 석굴로 일컬어지고 있다.
윈깡석굴은 조각상의 기세는 웅장하고 내용도 아주 풍부하면서 다채로워 기원 5세기 중국 석조예술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고 중국 고대 조각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 석굴이 개착되고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를 3시기로 나누면 전기는 소박하면서도 중후한 서역정서가 느껴지고, 중기 석굴은 아주 세밀하게 조각되어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다채로운 북위시절의 예술기풍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후기의 석굴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인물형상이 실제 인체에 근접한 야위고 준수한 모습의 형상으로 인체 비례가 적정하여 중국 북방석굴예술의 표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석굴을 둘러보면서 인간이 쌓아올린 귀한 문화의 흔적을 음미하는 즐거움과 함께 파괴된 흔적도 목도해야 되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는 데 많은 정성과 노력 그리고 적자 않은 물질적인 투자가 필요한 것이지만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순간이고 그 흔적 역시 오랜 역사시간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이곳 석굴에서 불상의 머리 부분이 유난히 많이 파괴된 것을 보고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