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21:30 (화)
중국구석구석탐색㊷'중국금융'의 효시'표호'
중국구석구석탐색㊷'중국금융'의 효시'표호'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7.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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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창박물관 곳곳 '다국적 금융'의 거대한 포석 흔적
전통 귀족가옥에 만든 '일득객잔'은 '古城호텔'의 격조

핑야오 현아는 핑야오 고성의 가장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처음 지어진 시기는 북위시기이나 지금도 같은 현 관아(官衙)의 형태가 형성된 것은 원명청 시기였다.

청조시기 귀족의 저택을 숙박업소로 개조한 一得객잔의 바깥모습. 건물내부 객실은 현대식으로 침대와 세면장, 화장실을 배치해 전통의 멋과 품위 현대의 편리함을 함께 갖췄다. 말하자면 서양의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을 호텔 등으로 바꾼 고성호텔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조시기 귀족의 저택을 숙박업소로 개조한 一得객잔의 바깥모습. 건물내부 객실은 현대식으로 침대와 세면장, 화장실을 배치해 전통의 멋과 품위 현대의 편리함을 함께 갖췄다. 말하자면 서양의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을 호텔 등으로 바꾼 고성호텔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관아건물 중 가장 오랜 것은 1346년으로 건축연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등 6백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관아는 남북을 관통해 배치되었고 좌우 대칭형태의 배치를 보여준다. 남북의 축선의 길이는 무려 200미터에 이르고 동서간의 거리는 일백여미터에 달한다. 핑야오현 관아는 현존하는 중국의 관아 4대 건축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고 동시에 규모가 가장 크기도 하다.

일승창 표호는 청조 도광 3년 ( 1823년 )에 핑야오현 시다푸村 거상 리다진이 출자하고 레리타이가 경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범했다. 표호는 중국 대륙 초기의 금융업의 원형으로 어음거래와 할인 등의 업무를 수행한 토착형태의 금융업의 시초였다. 이 건물은 핑야오고성 내 가장 번화한 시따제(西大街)에 자리잡고 있고 1600평방미터라는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다. 일승창의 금융업무는 중국대륙은 물론 유럽과 미주지역 그리고 동남아까지 확장되었고 점포가 진출한 도시가 30개를 넘은 다국적 금융기업이었다. 일승창 박물관을 들어서면 관광객은 “匯通天下”( 천하에 어음을 통용시키라 )란 편액을 볼 수 있다.

일득 객잔 내부의 식당 모습. 바닥은 돌을 깔았고 벽체와 천정은 목제로 처리하여 자연친화적이면서 상당히 편안한 느낌을 준다. 식당도 전체 객잔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기품이 느껴진다. 식당이 객잔 내부에 있어 일반식당의 번잡함과 어수선함이 없이 여유롭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식사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일득 객잔 내부의 식당 모습. 바닥은 돌을 깔았고 벽체와 천정은 목제로 처리하여 자연친화적이면서 상당히 편안한 느낌을 준다. 식당도 전체 객잔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기품이 느껴진다. 식당이 객잔 내부에 있어 일반식당의 번잡함과 어수선함이 없이 여유롭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식사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지금과 같은 교통과 통신환경이 아닌 당시에 이들의 사업목표를 보면 그들의 사업기상과 스케일, 목표를 엿볼 수 있고, 지금 중국의 금융업이나 동남아의 중국계인 화교들의 금융에 대한 감각들과 다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승창 박물관에는 이들 주택의 구조와 그들의 사업내용과 거래지역 그리고 그들의 일상의 삶을 전시된 유물을 통해 그려볼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사업분야보다 금융업은 신용이 생명일 것이고, 이에 대한 이들의 철저한 정신은 일승창 박물관에서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근대 중국 금융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최초의 표호(중국의 전통 금융기관) 일승창의 본부가 있었던 고성내 일승창 박물관의 현판. “匯通天下”( 천하에 어음을 통용시키라). 산서상인( 晉商 ) 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와 포부가 전해져 온다. 어음이라는 제도가 처음 창안, 시행되면서 상인들은 원거리를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고 어음 한 장으로 위험을 분산할 수 있어 근대 금융업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절 가장 선두에 선 금융기업이 바로 일승창이었고 그들의 사업포부는 바로 본부의 현판에 그 요체가 응축되어 있다.
근대 중국 금융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최초의 표호(중국의 전통 금융기관) 일승창의 본부가 있었던 고성내 일승창 박물관의 현판. “匯通天下”( 천하에 어음을 통용시키라). 산서상인( 晉商 ) 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와 포부가 전해져 온다. 어음이라는 제도가 처음 창안, 시행되면서 상인들은 원거리를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고 어음 한 장으로 위험을 분산할 수 있어 근대 금융업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시절 가장 선두에 선 금융기업이 바로 일승창이었고 그들의 사업포부는 바로 본부의 현판에 그 요체가 응축되어 있다.

핑야오 고성안의 문묘(공묘)는 공자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족이데올로기의 유지와 확산 그리고 전승에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기구이자 시스템이라고 생각된다. 핑야오 문묘는 당 태종 원년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대성전은 1163년 금왕조시절 중건되었고 지금까지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어 중국의 수많은 문묘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이다.

고성내 무예박물관에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친구들과 이곳에 소장된 청룡언월도 등 병장기를 들고 포즈를 취해 보다. 우측이 필자이고 친구들.
고성내 무예박물관에서 이번 여행에 동행한 친구들과 이곳에 소장된 청룡언월도 등 병장기를 들고 포즈를 취해 보다. 우측이 필자인 홍원선 박사.

문묘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 대성전과 학생들에게 유학경전을 교육하는 명륜당도 함께 한다. 문묘내에 설치된 龍門 구조물도 인상적이었다. 용문을 넘는 것은 바로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 왕조시절 청년 지식인들의 유일한 소망이자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을까 싶다.

청허관은 고성내 가장 큰 도관 (도교사원)으로 전통 건축배치의 원칙인 道東佛西에 따라 현성내 동따제(東大街)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기초지식을 갖고 고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한 골목길에서 만난‘ 一得객잔’이라는 전통여관이었다. 골목 깊숙이 아주 조용한 곳에 위치한 전통여관은 진입로와 건물 등 보이는 모든 구조물이 짙은 회색의 벽돌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는 접할 수 없는 특이한 아름다움이 있다. 접수부로 가서 방값을 문의하고 방을 구경하였다.

과거 왕조시절 청년 지식인들의 가장 큰 인생목표이자 꿈이었을 과거 급제. 용문을 오르는 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문을 오르면 눈앞에 입신출세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용문 뒤의 건축물은 유교경전을 교수한 명륜당이다. 文廟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함께 학생들에게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명륜당이 함께 한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廟學合一’(묘학합일)의 표현으로 성현에 제사지내는 것과 배움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과거 왕조시절 청년 지식인들의 가장 큰 인생목표이자 꿈이었을 과거 급제. 용문을 오르는 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문을 오르면 눈앞에 입신출세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용문 뒤의 건축물은 유교경전을 교수한 명륜당이다. 文廟에는 공자를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함께 학생들에게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명륜당이 함께 한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廟學合一’(묘학합일)의 표현으로 성현에 제사지내는 것과 배움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청조의 귀족의 전통가옥을 내부에 세면장과 침대 등을 넣어 전통의 고급스러움과 현대의 편리함을 가미한 쾌적하면서도 고급스럽고 동시에 전통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고성호텔이었다. 방값은 일박에 465위안과 595위안 두 가지가 보통의 방 숙박비였다. 이집은 청조 귀족의 저택이었고 건립된지 이미 3백년 가까이 된다는 객잔 직원의 설명이다.

고성내의 무예박물관 입구. 건물 상당에 ‘匯武林’(회무림)이란 현판이 보인다. 무인들이 모이는 곳이란 의미일텐데 이곳에 과거의 병장기들이 제법 많이 보관, 전시되었고 관광객들은 고대 무기를 만져볼 수 있다.
고성내의 무예박물관 입구. 건물 상당에 ‘匯武林’(회무림)이란 현판이 보인다. 무인들이 모이는 곳이란 의미일텐데 이곳에 과거의 병장기들이 제법 많이 보관, 전시되었고 관광객들은 고대 무기를 만져볼 수 있다.

이곳 직원들은 우리가 숙박 손님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고 방도 이것저것 많이 보여준다. 이미 타이웬에 숙박할 곳을 정해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숙박이 어렵겠다고 하니 식당이나 한번 구경하라면서 우리를 이끈다. 식당도 전통 저택을 그대로 살리고 의자나 탁자도 전통미가 풍기는 가구들을 배치하면서 조명도 약간 어두운 듯하게 처리하여 기품있는 식당 기분이 났다. 차와 야구르트를 시켜먹고 나니 바로 점심시간으로 이어져 점심도 주문하였다. 점심으로 쇠고기와 전통 산약요리 등을 주문했는데 전반적으로 음식에서 단맛이 났다. 종업원은 오늘 주방장이 급한 용무로 나오지 못해 보조 주방장이 요리를 하게 됐다며 나중에 식사비를 우대해 주겠다고 한다.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해주고 밥값도 깎아주겠다니 이들이 서비스정신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고성지역을 다니는 것은 힘이 든다. 3,4시간 거리탐색을 하고 피곤이 몰려와 차 한잔 마시고 피곤한 다리를 휴식하기 위해 처음으로 족부안마를 받았다, 1시간의 안마를 받은 후 다리는 완전히 새로운 다리가 되어 경쾌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중세시기로 시간여행을 하고 고성을 떠나 밤 8시 28분 출발하는 기차에 올랐다. 내일은 따퉁(大同) 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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