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가 전태일은 창업을 꿈꿨다. 그러나 “돈이...”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창업을 꿈꿨다. 그러나 “돈이...”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승인 2019.05.2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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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기념관에는 그의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고객 제일주의’ 창업메모 눈길
산업화와 민주화 이끈'이병철ㆍ정주영ㆍ전태일' 힘 합치면 어떨까라는 상상 떠 올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창업을 꿈꿨다. 모진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는 누이같은 어린 여자 근로자들을 지켜보면서 보란듯이 기업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했다. 전태일 기념관에는 그가 육필로 작성한 '창업 메모'가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을 취재하면서 필자는 산업화와 민주회를 이끈 이 세 사람이 함께 사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이 떵 올랐다. (가운데 전태일 커리커처는 전태일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창업을 꿈꿨다. 모진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는 누이 같은 어린 여자 근로자들을 지켜보면서 보란 듯이 기업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했다. 전태일 기념관에는 그가 육필로 작성한 '창업 메모'가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을 취재하면서 필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끈 이 세 사람이 함께 사업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떠 올f렸다. (가운데 전태일 캐리커처는 전태일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있다)

전태일은 한국경제 성장사의 아픈 손가락 중 하나다. 그는 지난 3월 문을 연 ‘전태일기념관’에서 49년 만에 우리와 마주했다. 1948년생인 그가 가난의 굴레를 벗고자 18세에 들어간 봉제공장. 서울 동대문 인근 평화시장 주변의 그 공장엔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전태일보다 훨씬 어린 근로자들로 가득 찼다. 전태일은 고사리 손으로 밤새 미싱을 돌리는 누이 같은 동생들을 지켜보며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전태일 기념공간은 꼭 ‘전태일의 삶’만을 웅변하고 있지 않다. 자원은 물론 기술도 고작 ‘미싱을 돌리는 일’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했던 그때 그 시절.

당시 우리의 국력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노동환경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기념관은 이렇게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1966년 전태일이 통일사에 미싱사로 취직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는 하루 기본 15시간의 장시간 노동은 물론, 밤새 야간작업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임금 역시 업주의 재량으로 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을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작업장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노동했다. 불안정한 고용환경으로 비수기에는 실업자가 되었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영양실조, 만성 소화불량, 신경계통 및 호흡기 질환, 안질 등 대부분의 노동자가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는 건강검진이나 휴가 등 복지는커녕 병세가 악화되면 해고조치 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노동착취 현장에서 전태일은 정직한 재단사가 되어 연약한 직공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같은 해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

전태일은 봉제업체 창업에 앞서 고객관리 전략을 꼼꼼이 메모했다.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과 옷가게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생산한 제품의 마케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메모에는 차별화 전략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전테일 기념관서 촬영)
전태일은 일할 사람을 구하고 마케팅을 하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창업 자금이 없어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가 '사업방침'이란 제목을 붙인 메모에는 "돈이 있는 친구나 친인척이 없다"고 한탄했다. (전태일 기념관서 촬영)

그런 까닭에 전태일은 창업을 꿈꿨다. 근로자와 업주가 똑같이 일하고 이익을 균등 배분하는 회사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 세상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모범업체 ‘태일 피복’은 이상향(理想鄕)의 기업처럼 기념관에서만 문을 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창업메모에는 경쟁에서 살아 남고자하는 치밀한 사업계획이 빼꼭히 적혀 있다. 그는 노동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자체만 보면 그에게서 ‘기업가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서울시내 어느 곳이든지 의류점이 있는 곳의 약도와 기업주의 주소 성명을 확인한다(주요고객 확보). 주문은 3시간 이내에 어느 곳이든 배달할 수 있도록 오토바이 5대 구비한다(주문생산 및 적기배달).

그리고 직접 왕림하시는 고객에겐 퍼블릭카로 목적지까지 모신다(고객제일주의). 공장상품의 치수와 색별을 월 1회이상 시내 각 상점마다 통보하고 주문을 받는다(마케팅 차별화). 월 1회 본 상점의 영수증번호를 추첨하여 상품을 제공한다(단골고객 확보). 주문자의 의견을 파악검토 한 후 품질개선에 힘쓴다(지속적인 품질개선). 학생복을 기성복으로 만들어 학생복 기성화의 소비자의 이익을 이해시킨다(즉 기성복으로 만들면 학부모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그러면서 전태일은 기성 학생복 제작의 마케팅을 위해 ▲장학금 ▲오토바이 ▲피아노 등을 경품을 내세우자는 아이디어도 구상했다. 하다못해 학생복(여름 교복) 윗도리를 한 장 더 주는 방법까지 고안했다. 기업은 생존하면서 소비자와 근로자들과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렇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전태일은 사람을 구해놓고 마케팅도 잘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창업 자금이 없어 고민한 흔적이 있다. 그가 '사업장침'이란 제목을 붙인 메모에는
전태일이 '사업방침'이라고 제목을 붙인 메모에는 고객관리 전략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서울에 있는 봉제공장과 옷가게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적은 것을 보면 마케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메모에는 차별화 전략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전태일 기념관서 촬영)

그러나 전태일은 이 창업이 쉽지 않음을 직감했던 것일까. 그가 분신한 그해 봄. 1970년 3월17일 밤 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사업계획을 세워 놓았고 나를 도와서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이 주위에 있다.(함께 일 할 수 있는 노동력이 있음을 설명한 듯) 때문에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이상을 행한 거나 다름없다.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학력이 없으므로 대학 동창이 없다. 또한 집안 친척들 중에도 나의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만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몸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에서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사업을 꼭 이루고야 말 것임. 나는 이 사업을 3~5년간 내가 전 권한을 책임지고 받는 대신에 이 사업이 완전한 궤도 위에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할 시기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부를 자금주에게 반환할 것이다. 자금주는 나의 한 몸을 바친 알찬 결실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좋기 때문에 투자를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업이 끝나면 경제계에서 떠날 것이다.”

전태일이 악덕 업주를 고발하고 노동 당국에 경종을 울리고자 분신을 한 것은 1970년이다. 이 해 11월13일 서울 동대문의 평화시장 앞에서 피복공장의 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렸다. 어린 근로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당시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서울대 학생들이 시국선언에 나서면서 ‘전태일의 분신’은 전국 각지에 울림을 주었다. 한자 투성이의 노동법전을 뒤적이며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하고 아쉬워했던 전태일의 절규는 엘리트 젊은이들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전태일 분신 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전기를 마련했다. 1970년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그의 분신 자살사건은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시국사건을 도맡았던 조영래 변호사(1947~1990)는 전태일이 삶을 정리한 <전태일 평전>을 썼다. 조 변호사는 독재의 눈과 칼날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평전을 쓰듯이 3년에 걸쳐 그 책을 마무리했다.

전태일이 상경해 일을 했던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는 다닥다닥 붙은 봉제공장이 즐비했다. 어린 소녀들은 일감이 넘치면 밤새 작업을 해야했다. 꼼짝하기가 어려운 공간에서 옷가지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속에서도 일을 하다보니 대부분은 호흡기 질환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전테일 기념관서 촬영)
전태일이 상경해 일을 했던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는 다닥다닥 붙은 봉제공장이 즐비했다. 어린 소녀들은 일감이 넘치면 밤새 작업을 해야했다. 꼼짝하기가 어려운 공간에서 옷가지에서 나오는 미세먼지 속에서도 일을 하다보니 대부분은 호흡기 질환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전태일 기념관서 촬영)

전태일 분신사건 이후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 1979년 부마사태에 이는 10.26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어 1987년 6월 넥타이 부대(엘리트 사원)가 합류한 민주항쟁, 여야 간 정권의 수평적인 교체 등으로 '정치 민주화'의 도태를 쌓았다. 그 만큼 이젠 노조의 영향력도 세졌다. 최소한 대기업의 부당 노동행위가 이뤄지기는 사실상 어려운 세상이 됐다. 일각에선 비대해진 '노조 권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다. 전태일 기념관은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과 청계천 사이에 있다.  

필자는 전태일 기념관을 나서면서 한국 경제를 이만치 일군 대기업 창업주들의 삶을 한 곳에 정리한 기념관이 왜 없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권력자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기업가들이 몇이며, 그들이 일생을 바쳐 키운 기업체를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그룹이 사력을 다해 운영중이던 사업은 다른 업체로 합병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 땅에 노동 인권이 있다면 ‘기업가 정신’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근로자의 인권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전태일이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를 곱씹으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사회의 편향적인 이념전쟁에서 ‘우리가 지향하고 일궈나갈 사회’란 큰 그림은 놓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태일의 삶’은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한 인물들에 대한 공과 과를 공평하게 평가할 때 더 빛나지 않을까. 특히 지금 50대 이상의 상당수는 ‘산업화와 민주화’ 양쪽에 모두 밀알을 놓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촛불을 든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일군 것이다. 피안의 세계에서 이병철, 정주영과 전태일이 만났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가상이다.

▲이병철=무노조 경영을 했지만 오해 말게. 나는 종업원들, 즉 인재를 가장 사랑했다네. 선진국을 따라가기 위해선 당시는 경영자와 종업원이 한 몸 한 뜻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종업원 월급을 다른 기업보다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한 점은 알아주게.  당신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나도 목숨을 내놓고 경영을 했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애를 태웠지. 심지어 회사를 내놓으라하고 주력사업을 뺐긴 기업도 있었지. 또 예전엔 '정치자금'을 안내면 혼이 났지. 반도체 투자는 내가 평생 키운 ‘삼성’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결단했다네. 당시는 누구나 말렸고 심지어 해외에선 조롱까지 받았지. 아무튼 당신도 나라를 사랑했다고 생각하네. 내 경영 신조가 ‘사업보국’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의 창업메모를 보니까. 실제로 ‘태일피복’이 나왔으면 국내 굴지의 회사로 성장했을 거야. 고객을 하늘로 생각하는 기업은 다 잘되는 법이지.

전태일이 부모님과 찍은 사진. 사진으로 보아 1950년 한국전쟁 직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오른쪽 아레 어린이가 전탸일이다. 아기를  무릎위에서 안고 있는 사람이 전태일의 어머님 이소선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분신자살하자 이후 노동인권 운동가 변신해 평생 근로자편에 섰다.(전테일기념관서 촬영)
전태일이 부모님과 찍은 사진. 사진으로 보아 1950년 한국전쟁 직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오른쪽 아래 어린이가 전태일이다. 아기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사람이 전태일의 어머님 이소선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분신자살하자 이후 노동인권 운동가로 변신해 평생 근로자편에 섰다.(전태일 기념관서 촬영)

▲전태일= 사람은 있는데 자금을 구할 수 없었어요. 제대로 한번 사업을 해서 근사한 일자리를 만들고 싶었는데. 요즘처럼 정부가 창업을 지원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읺았을까요. 엔젤 투자가들도 많고요. 그런데 그땐 너무 화가 났어요. 근로자를 업신여겼으니까요. 분신 말고 제가 무엇으로 사회에 경종을 울릴수 있었을까요. 

▲정주영= 나는 스스로 ‘대표 노동자’로 생각했어.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만 했지. 자네 언제 한번 내 구두를 봤나. 다 떨어졌지만 새 구두를 신는 것보다 헌 구두가 편하더군. 사치도 별로 못해 봤어. 달러를 벌어 국민들 배고픔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신바람 났는지 몰라. 그런데 요즘 기업인들이 신바람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 교과서에 자네 이야기는 나오고 우리 이야기는 쏙 빠졌다는데 그게 맞아.

▲전태일= 저도 지금 생각하면 기업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젠 삼성이나 현대가 세계적 기업이 됐으니까 좀 더 근로자들에게 아량을 베풀었으면 해요. 우리나라 기업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이 걱정이지만. 기업이 생존하지 못하면 근로자들의 공간도 좁아지죠. 제가 구상한 '태일피복'은 그래서 다른 봉제업체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하 그러니까 우리 세 사람은 시대적 어려움을 함께 헤처 나간 거네요. 언제 한번 저의 기념관에 같이 놀러 가요. 영화도 보여준답니다. 그리고 만약에 두 회장님의 기념관이 세워지면 저도 축하하러 갈게요. 우리나라가 갑자기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니잖아요.

▲이병철, 정주영=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면 태일군과 한번 사업을 같이 하고 싶어. 그 땐 돈 걱정 말라고. 우리 소주나 한 잔하러 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