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05:55 (수)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5) 재무부의 '독립선언'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5) 재무부의 '독립선언'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10.1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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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금리보다 예금금리 높아지자 대출받아 은행에 넣는 부작용 속출
장기영 부총리 앞에서 "금리조정은 내가 하는 것"은행감독원장 질책
중소기업 등 대출금리 인상 움직임에 비상…말 앞서다 조기해임 빌미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IMF 총회에 참석해 큰 '업적 꾸러미'를 안고 10월 9일 귀국한 쓰루는 바로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재무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의 진의가 '더 이상 왕초(기획원)에게 눌려 지내지 않겠다'는 데에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재무부는 그동안 왕초와 기획원에 휘둘려 '기획원 재무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동안 재무부가 잃고 이제 쓰루가 되찾겠다는 '재무부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그 후 한 달을 두고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재무부 영광 되찾기' 시도는 그 사흘 뒤에 있었다. 10월 13일 쓰루는 "역금리 체계를 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역금리는 1965년 9월 30일의 '금리 현실화' 조치로 대출금리(26%)보다 예금금리(30%)가 높아진 비정상적 금리 체계를 말한다. 역금리를 도입한 장본인은 왕초였다.

쓰루의 역금리 시정 선언은 왕초로부터의 독립 선언이었다. 역금리 시정 발언은 현금차관의 경우처럼 쓰루 혼자 속으로 품어온 생각은 아니었다. 언론을 통해 오랫동안 빈번히 제기되어온 정책 제안을 그가 판단하기에 적절한 시기에 자기의 정책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역금리는 정기예금만 420억 원이 늘어나는 등 기대하던 내자 동원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대출에 대한 가수요가 늘어나면서 심지어 대출을 받아 예금을 하는 예까지 발생하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폐해는 은행 경영수지 악화였다.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은 '제도적' 손해를 보전해주느라, 한국은행이 일반 은행으로부터 받아두는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쳐주고 있었다. 즉, 직접적으로는 일반은행이 역금리의 부담을 떠안는 형태지지만, 결국에는 한국은행 나아가 정부와 국민이 그 부담을 지게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여건과 그 변화를 고려할 때, 이제는 금리를 정상화(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낮게 조정하는 것)할 때라는 것에 대해 관계인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조성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방법에 의견이 갈린다는 데에 있었다. 금융계가 바라는 금리 정상화는 대출금리를 예금금리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리는 것, 즉 상향 조정이었다. 쓰루나 민간기업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대출금리 수준이 기업, 특히 중소기업에는 너무 높은 벽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문상철 은행감독원장이 호기롭게 총대를 메고 나섰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 산하기관이었다. 그래서 한국은행 임원이 돌아가며 그 원장이 되었다.) 그는
문상철 은행감독원장이 호기롭게 총대를 메고 나섰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 산하기관이었다. 그래서 한국은행 임원이 돌아가며 그 원장이 되었다.) 그는 "(30%의 높은 금리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예금은 비곗살"이라면서, "금리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예금금리를 낮출 게 아니라 대출금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대출금리를 올려 금리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은행 수지 개선에 치우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쓰루와 기업에 금리 정상화는 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낮추는 것, 즉 하향 조정이었다. 젊은 시절 은행 대출의 쓰라린 경험이 얼마나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은행과 대출 고객 중에 한쪽 편을 들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대출 고객의 손을 들어줄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한국은행을 포함한 금융계는 그가 예금금리를 낮추는 선택을 하도록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쓰루가 나서기 전에 금융권이 선수를 쳤다. 10월 18일 문상철 은행감독원장이 호기롭게 총대를 메고 나섰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 산하기관이었다. 그래서 한국은행 임원이 돌아가며 그 원장이 되었다.) 그는 "(30%의 높은 금리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예금은 비곗살"이라면서, "금리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예금금리를 낮출 게 아니라 대출금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금금리를 낮춰서 금리 정상화를 추진한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시중은행 수익 악화를 감안할 때 일정 기간 동안에 대출금리를 인상할 필요가 있다"는 말까지 보탰다. 그러면서 자기주장이 (한국은행 부총재 출신의) 왕초의 경제기획원, 한국은행, 시중은행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은근히 과시했다. 그것이 쓰루가 재무장관을 그만둘 때까지 문 원장이 공식적으로 정책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내놓은 입장이었다.

바로 다음 날 은행감독원장이 재무장관실에 호출되었다. "도대체 은행감독원이 어디 소속이냐"로 포문을 연 쓰루는 문 원장에게 지나칠 정도의 기합을 넣었다. 보다 못한 왕초가 "금리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쓰루는 "금리 문제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라는 한마디로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왕초를 무시해버렸다.

쓰루라는 비(非)은행 출신, 아니 반(反)은행 인사가 재무부 장관이 되었을 때, 금융계에서 우려했던 바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은행감독원을 포함해 한국은행까지 '입 다물고' 쓰루의 금리 체계 개편안을 기다려야만 했다.

언론은 쓰루가 얼마나 재무부 장관을 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점치기 시작했다. (쓰루는 역금리 시정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 전에 재무장관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이다. 역금리 시정도 1968년 4월 1일 박충훈 부총리 때 시발하여 쓰루가 부총리가 되기 직전인 1969년 6월 1일, 정기예금금리를 일반대출금리 밑으로 끌어내리면서 실현되었다. 지나치게 말이 앞서 결국 빈말이 되어버린, 쓰루의 많은 발언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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