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5:20 (수)
중국구석구석탐색⑰공산당의 성지 엔안(延安)
중국구석구석탐색⑰공산당의 성지 엔안(延安)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4.16 2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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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에 쫓겨 천신만고 끝에 둥지 튼 곳… 모택동 숙소는 혁명 유적지로 보전

오늘 옌안 (延安)으로 간다. 신중국에서 옌안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이곳은 혁명세력이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은 후 장정을 끝내고 정착하면서 공산당 세력을 정비하고 다가올 항일투쟁과 對국민당 투쟁에서 역량을 강화하여 종국적으로 신중국을 건국하는 바탕과 실력을 형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옌안 자오웬(棗園)혁명 유적지 내의 마오저둥이 살았던 옛집. 1943년 10월 마오저둥은 양지아링에서 이곳 자오웬  숙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그는 중국 공산당 제6기 7중전회와 제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를 주재했고, 이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임됐다.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論연합정부] [항일전쟁 승리후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란 아주 중요한 문건을 저작했다.
옌안 자오웬(棗園)혁명 유적지 내의 마오저둥이 살았던 옛집. 1943년 10월 마오저둥은 양지아링에서 이곳 자오웬 숙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그는 중국 공산당 제6기 7중전회와 제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를 주재했고, 이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임됐다.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論연합정부] [항일전쟁 승리후 시국과 우리의 방침]이란 아주 중요한 문건을 저작했다.

공산당은 이곳에서 건국 이전 공산주의 방식으로 사회경제조직을 실제 운용해 보는 등 통치경험을 쌓는 등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옌안은 중국 공산당의 창당과 국공 합작, 그리고 장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공산당의 실력을 키우고 결국 건국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시기로 이 지역을 기반으로 중국대륙을 통합하게 된다. 지금 중국인에게 있어 이곳은 단순히 수많은 지역 중의 한 곳이 아니라 종교 신도들에게 종교발상지가 갖는 성지와 동격인 공산혁명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고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중국당국의 노력도 부단히 이어지고 있다.

아침 고속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을 타다. 이곳에서도 지하철 안전요원인 젊은 여성직원이 필자가 손에 든 생수통을 열어 물을 마셔보라고 한다. 생수검사장비에 올려두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고장이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물 한모금을 마시게 됐다. 고속철 역사에 도착하여 중국계 패스드푸드 체인점인‘李先生’이란 가게에 들러 버섯닭고기 덮밥과 바로 옆 가게인 켄터키치킨점에 가서 커피를 한잔 주문해 먹고 바로 고속철에 올랐다. 역사도 고속철역사이고 열차도 고속철 열차 종류인데 열차의 속도는 전혀 고속이지 않았다.

자오웬(棗園) 혁명유적지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옌안시절 공산당 주요 부서와 함께 당시 최고 공산당지도부의 숙소가 함께 모여 있다. 마오저둥, 주더, 류샤오치, 주은라이의 숙소와 6.25전쟁 때 북한 김일성을 돕는 중공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펑더화이의 숙소 표시도 보인다.
자오웬(棗園) 혁명유적지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옌안시절 공산당 주요 부서와 함께 당시 최고 공산당지도부의 숙소가 함께 모여 있다. 마오저둥, 주더, 류샤오치, 주은라이의 숙소와 6.25전쟁 때 북한 김일성을 돕는 중공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펑더화이의 숙소 표시도 보인다.

시안에서 옌안까지 최고속도가 140 - 150km정도이고 주로 100km이하의 속도로 주행하였다. 2시간 20여분만에 옌안에 도착했다. 옌안에 도착한 첫 느낌은 아주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철도 양켠은 바로 얕은 야산으로 맨흙이 드러나 있고 드문므문 풀이 보이는 아주 황량한 느낌을 주는 곳이고 앞뒤 야산이 바싹 다가서 있어 야산 중간에 있는 철길과 철도역사가 두 야산 사이에 낀, 짓눌린 느낌이 들었다. 도시 전체가 폭이 좁고 토양도 척박하고 왠지 황량하다는 느낌이 든다.

역구내를 벗어나 택시를 타려고 하니 이런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아예 원거리 손님을 받을 작정인지 시내 중심가를 말하니 들은 척도 안한다. 거의 모든 택시가 당연하다는 듯이 합승을 한다. 역 앞 택시 승차질서가 무질서해 보여 가방을 끌고 도심방향으로 버스 정거장 기준으로 한 정류장 정도를 걸었다. 중간에 행인에게 시내 중심가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 것인가를 물었더니 차를 타고 가는 게 좋을 것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더니 다가와 선다. 이곳의 중심가는 바로 고유명사‘중심가’이고,‘중심가’로 가겠다고 하니 타란다. 이미 탑승한 2명의 승객과 함께 약 15분여 이동해 중심가에 닿았다.

옌안시내에 있는 혁명기념관의 모습. 중앙에 보이는 것은 마오저둥의 동상
옌안시내에 있는 혁명기념관의 모습. 중앙에 보이는 것은 마오저둥의 동상

시중심가로 보기에 아주 초라해 보였다. 어지간한 縣城도 이보다 컸던 것 같았다. 내려서 몇 군데 호텔을 둘러봤다. 한 곳은 외국인을 받을 수 없는 호텔, 즉 외국인 숙박면허를 받지 않은 호텔이었고 다른 호텔은 겉은 번지르르한데 샤워기가 문제였다. 결국‘옌안여유대하’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일박에 235위안이고 이틀분 숙박비와 보증금을 더해 800위안을 맡겼다. 중국의 모든 호텔에는 우리와는 달리 보증금을 받는다. 가령 객실이나 집기나 비품을 훼손하거나 아니면 국제전화 혹은 객실내의 미니바 등을 사용할 경우를 예상하여 숙박비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두고 체크아웃할 때 정산하여 보증금을 차감하거나 전액 되돌려주는 것이다.

호텔직원에게 공산혁명유적지를 문의하고 몇 군데 갈 곳을 추천받았다. 시내 구경에서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시내버스 노선이 가장 핵심적인 3곳의 혁명유적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교통이 편하다는 점이었다. 중국 공산당史나 아니면 중국의 혁명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명이 아마도 옌안일 것이다.

양지아링( 楊家嶺 ) 혁명유적지에 있는 대강당 모습. 약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내부 공간 규모로 1945년 4-6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됐다. 50일간 계속된 회의에서 755명으로 구성된 전국대표들은 마오저둥을 영수로 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마오저둥 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였다. 이 시점부터 마오저둥이 공산당 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됐고, 국공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마오저둥의 중국이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 강당에서 본 가장 인상적인 공산당의 슬로건은“마오저둥의 기치 아래 전진 승리하자”였다.
양지아링( 楊家嶺 ) 혁명유적지에 있는 대강당 모습. 약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내부 공간 규모로 1945년 4-6월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자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됐다. 50일간 계속된 회의에서 755명으로 구성된 전국대표들은 마오저둥을 영수로 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마오저둥 사상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확립하였다. 이 시점부터 마오저둥이 공산당 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됐고, 국공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마오저둥의 중국이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 강당에서 본 가장 인상적인 공산당의 슬로건은“마오저둥의 기치 아래 전진 승리하자”였다.

중국인에게 바로 현대의 중국인에게 옌안이란 단순한 지명이 아니고 지역명을 넘어 공산당의 정신, 공산당인 지녀야 할 가치관으로 상징, 승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은 장정을 마무리 짓고 건국 이전에 정권을 운영해 보았으며 다양한 사회주의 관리방식과 시스템을 창안하여 시행하기도 했다. 옌안을 말하지 않고 중국공산당, 신중국을 설명할 수는 없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곳은 양가령 혁명유적지의 대강당에서 개최된 제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의 슬로건이었다. <마오저둥의 기치아래 전진 승리하자> 바로 이 시점이 마오저둥의 리더십이 확립된,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명실공히 마오저둥의 공산당이 되고 이어 49년 건국 시점부터는 종신토록 중국대륙이 그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의 체제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많은 정치적인 논란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인민의 뇌리 속에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어느 관광지에서 남루한 노동자복 차림의 중년이 ‘붉은 태양’이란 마오저둥 찬가를 부르자 주변의 다른 중년들도 함께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수많은 학생들이 이 혁명유적지를 참관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으로서는 어린 세대들에게 혁명정신을 부단히 주입, 고양시킴으로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해나가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혁명 당시 중국의 경제수준과 물자부족의 탓이겠지만 공산당 최고지도자들의 생활공간을 보면 나무침상에 솜이불, 나무의자와 나무 책상 그리고 구식 전화기 등이 놓인 게 전부이다. 이를 참관하는 노동자, 농민들은 자신들과 중국지도자들 간에 비슷한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여행을 올 형편이 되는 사람이라면 초기 공산당 지도자들보다는 물질적 환경이 나을지도 모른다. 봉건체제, 제국주의 체제, 관료주의 체제에 맞서 인민을 해방시켰다는 공산당의 혁명과정에 대한 지속적인 후세대에 대한 교육과 학습 그리고 중년 이상의 곤궁한 사람들의 과거 계획경제시기의 부족하지만 평등했던 시기의 향수 등이 어우러져 중국체제는 외부에서 이런저런 전망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견고한 것이라 생각된다.

옌안 시내 모습. 혁명유적지를 알려주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옌안 시내 모습. 혁명유적지를 알려주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관건은 경제일 것이다. 세상사의 궁극적 귀결점은 경제인 듯하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주의국가가 바로 지금 중국 공산당이 내거는 핵심 국정 슬로건일텐데 참으로 어려운 국가목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국정 목표를 국가목표로 설정하지 않는 국가가 지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런 목표는 실현 가능성을 전제하는 그런 국가목표가 아니라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국가 목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혁명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초기 공산당인, 지도자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 등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지만 과연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13억 모두가 잘 살게 되는 경제이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가장 못 살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평등했던 범주의 국가가 경제력이 급격히 커진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범주의 국가로 변해가는 상황이 오버랩 된다.

내일은 섬서성 북단 도시인 위린으로 갈 생각이다. 이곳은 아무래도 너무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을 여행자에게 준다. 빨리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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