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0:10 (수)
중국구석구석탐색㉑'長城의 눈'鎭北台
중국구석구석탐색㉑'長城의 눈'鎭北台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4.26 22: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방의 몽골등 유목민족 동향을 감시하던 전베이타이(鎭北台)는 만리장성 3대 절경의 하나

홍석계곡을 나서서 왕복 2차선 아스팔트길을 따라 2km 걸어가면 명조 시기 가장 거대하고 호방한 만리장성의 한 부분으로 주변지역을 감시하는 군사목적의 감시탑인 전베이타이(鎭北台)를 만날 수 있다.

내몽골과 한족의 땅 섬서의 경계에 서 있는 과거의 군사감시탑인 전베이타이 모습. 중국인은 이곳과 산해관 ( 중원과 만주를 구분짓는 관문 ) 과 가욕관 ( 중원과 서역을 구분짓는 관문 )을 장성 3대 절경이라고 부른다. 一望無際! 이 군사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면 망망대해와 같은 내몽골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눈길을 돌려 남쪽을 보면 그곳은 한족의 땅이었다. 구릉도 보이고 나무도 제법 많고.
내몽골과 한족의 땅 섬서의 경계에 서 있는 과거의 군사감시탑인 전베이타이 모습. 중국인은 이곳과 산해관 ( 중원과 만주를 구분짓는 관문 ) 과 가욕관 ( 중원과 서역을 구분짓는 관문 )을 장성 3대 절경이라고 부른다. 一望無際! 이 군사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면 망망대해와 같은 내몽골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눈길을 돌려 남쪽을 보면 그곳은 한족의 땅이었다. 구릉도 보이고 나무도 제법 많고.

전베이타이(鎭北台)는 만리장성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3대 장성 구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들 3대 구조물은 첫째 동북지방( 만주 )과 중원을 구분짓는 하북과 요동의 경계지점의 산해관, 서역과 중원을 구분짓는 감숙성 내의 가욕관과 함께 이곳 전베이타이로, 중국인들은 이들 구조물들을 만리장성의 3대 절경이라고 입을 모은다. 전베이타이는 바로 내륙의 농경문화즉 한족의 문화지대와 바로 위 몽골평원에서 유목하는 몽골족의 대치상황을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즉 이 전베이타이는 문화의 경계선이자 양대 세력의 군사적 대치의 하나의 표현으로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유목민족이 농경지역으로 침입하는 것을 감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양대 세력이 충돌,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 최전선의 땅이었다. 몽골지역이 중국의 영향력 내로 편입된 청조 강희제 시기 이후에도 한족과 몽골족의 민족 간 감정은 서로 융화되지 못했고 대립과 충돌이 이어졌다. 청조는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민족 간의 적절한 균형을 통한 안정적인 통치기반 구축을 위해 이 부근 즉 원래 장성이 설치된 중간의 30리 지역을 완충지대로 설정해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두는 정책을 유지했다.

전베이타이 박물관내 전시된 모형. 이곳 전베이타이는 기본적인 역할이 북쪽 유목세력의 군사동향을 감시하는 것이었으나 늘 군사적인 용도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유목과 농경 두 세력의 화평시기에는 이곳 전베이타이가 경제와 문화교류의 창구로 기능했음을 이 모형은 말하고 있다. 유목민과 농경민이 필요하는 물품은 서로 달라서 이곳에서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해두고 있다.
전베이타이 박물관내 전시된 모형. 이곳 전베이타이는 기본적인 역할이 북쪽 유목세력의 군사동향을 감시하는 것이었으나 늘 군사적인 용도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유목과 농경 두 세력의 화평시기에는 이곳 전베이타이가 경제와 문화교류의 창구로 기능했음을 이 모형은 말하고 있다. 유목민과 농경민이 필요하는 물품은 서로 달라서 이곳에서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해두고 있다.

몽골족의 땅에 한족이 경작을 위해 들어갈 경우 당국의 허가를 받되 이곳에서 정주하지는 못 하도록 했다. 즉 봄철 농경이 시작될 때 한족이 몽골족의 땅에 경작하러 들어가되 겨울이 오기 전에 이곳을 반드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런 과거 한족과 몽골족의 삶을 이들 양대 세력의 경계지점이었던 만리장성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인 이곳 전베에타이에서 그려볼 수 있었다. 一望無際! 전베이타이에서 북방을 향해 보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초원이 나타나 나그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개방감과 답답했던 가슴이 확 열리는 듯한 통쾌함을 준다. 그러나 눈을 돌려 남쪽 즉 전통적 한족 지역을 보자면 약간의 구릉도 보이고 나무도 보여 확실히 이 지역이 점이지대, 중간지대임을 실감하게 된다. 전베이타이는 4층 구조로 높이가 자그마치 30m나 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이 대의 북쪽은 82m, 남쪽은 76m, 동서는 각각 64m로 전베이타이가 차지하는 바닥면적만 5056평방m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명대에 건설된 이 전베이타이는 높이는 12m이고 외부성벽은 10m, 내부성벽은 5.5m로 명 만력 연간 (1607-1608년 ) 건설된 것으로 장성에서 가장 큰 군사 전망대였다고 한다.

전베이타이 가장 높은 망루에서 내몽골 초원을 조망하다. 一望無際!  넓디넓은 내몽골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나그네의 생각의 갈래도 끝없이 펼쳐진다. 이렇게 평화스럽고 여유로운 이 공간이 과거 유목민과 농경민의 끊임없는 충돌과 살육의 최전선이었으리라. 그때 원수이고 적이었을 그들이 이제는 ‘형제’가 되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 간에 국가 간에 작동하는 진리일까? 진리가 있기는 한건가? 이 전베이타이 높은 망루에서 갖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전베이타이 가장 높은 망루에서 내몽골 초원을 조망하다. 一望無際! 넓디넓은 내몽골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나그네의 생각의 갈래도 끝없이 펼쳐진다. 이렇게 평화스럽고 여유로운 이 공간이 과거 유목민과 농경민의 끊임없는 충돌과 살육의 최전선이었으리라. 그때 원수이고 적이었을 그들이 이제는 ‘형제’가 되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 간에 국가 간에 작동하는 진리일까? 진리가 있기는 한건가? 이 전베이타이 높은 망루에서 갖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 시설은 기본적으로 군사시설로 전방 몽골초원의 동태를 감시하는 군사적인 목적의 감시업무가 주로 부과되었지만 늘 전쟁과 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북쪽의 몽골족이나 기타 이민족과의 교역이나 경제교류도 이곳을 통해 이뤄졌다고 자료는 설명해준다. 물론 지금의 전베이타이는 더 이상 군사시설도 아니고 과거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대립과 항쟁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 두드러져 보이지만 예전 화평시기에는 상호교류의 통로로서 작동된 곳이기도 하다. 그때 서로 전투하고 살육을 벌였던 인구집단은 지금 주류 중국인인 한족의, 중국당국의 표현으로 ‘한 형제’가 되었다. 이 전베이타이를 둘러보고 가장 높은 망루에서 내몽골 초원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무상함이 새삼 느껴진다. 우리가 굳건히 지켜야 할 지고의 가치와 진리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곳 전베이타이가 말없이 일러주는 것 같다. 흔히 국가 간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고 단지 영원한 이익만 있다고 한다. 몽골초원과 중원 땅이 만나는 이곳에서 그들은 과거의 적과 원수 관계에서 지금은‘한 형제’가 되었다.

앞서 참관한 홍석계곡에서는 우리의 종교감정과 종교행태에 대해 이곳 전베이타이에서는 전쟁과 평화, 친구와 적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사유의 시간이 되었다.

전베이타이 입구에 ‘만리장성 제일대’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전베이타이 입구에 ‘만리장성 제일대’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교외 여행을 마치고 다시 시내로 돌아오면서 다시 어제 맛보았던 길거리의 위구르인이 경영하는 포장마차에 들러 꼬치구이를 더 맛보고 대화를 이어갔다. 양고기를 해체하는 칼은 모두 3종류였고 큰 덩어리를 해체하는 칼과 중간칼 그리고 뼈와 연결된 부위를 마지막으로 철저히 떼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작은 날카로운 칼이 사용되었다. 어제 만났던 위구르족 꼬치구이팀 옆에서 꼬치구이 포장마차를 하는 청년이 다가와서 한국 원화와 중국의 인민폐의 교환비율, 환율을 묻고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한국에 꼬치구이집이 있는가, 한국서 장사하고 싶다 등등. 이들에게 한국은 잘 사는 나라라는 국가이미지가 강렬하게 입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5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