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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⑥100년전 美대통령 딸의訪韓
영화로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⑥100년전 美대통령 딸의訪韓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2.0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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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아시아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얄리스', 개인자격으로 대한제국 들러
황실은 직접나서 환대했지만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기는 美日 '밀약'에 속아
아버지 루즈벨트 대통령은 J.P.모건을 '해적'이라면서 국제무대선 약자편에 안서

『"라이슐리는 진짜 해적인가요?" "그렇단다. 우리가 아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야만적 해적이지." "왜 그렇게 얘기하시나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해적질하기에 너무 빨리 크고 있어." "알고 계신 해적이 또 있나요?" "있지." "누구예요?" "J. P. 모건. 그는 내가 직접 아는 유일한 해적이지." "그럼 그를 쇠사슬로 묶어 데려 오세요." "모건을? 그건 안 되지." "아니요, 라이슐리요."』

영화 <바람과 라이온>의 한 신(Scene)에 등장하는 대화다.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그의 장남인 루즈벨트 주니어, 장녀인 앨리스(Alice)의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이다. "라이슐리가 해적이냐"는 질문과 "알고 있는 해적이 또 있느냐"는 질문은 주니어가, "그를 쇠사슬로 묶어오라"는 말은 앨리스가 했다. 답은 당연히 아버지인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 것이다.

이 신을 보면, 시쳇말로, '웃프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웃기지만 슬픈' 또는 '슬프지만 웃긴' 대화인 것이다. 라이슐리는 모로코의 한 부족 족장이다. 1904년 모로코 내 미국 가족을 납치해 당시 미국에서 크게 이슈가 됐던 인물. 그를 가리켜 '마지막 남은 야만적 해적'이라니 제국주의 시대의 미국 또는 백인 우월주의가 느껴진다. 그를 "쇠사슬로 묶어 데려오라"는 천진난만한 스무 살 처녀의 말에는 이 같은 우월주의가 한층 깊이 배어있는 것 같다.

이들 대화는,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라이슐리를 쇠사슬로 묶어 데려오라는 이 앳된 처녀. 대화를 나눴던 다음해, 즉 1905년 그는 우리나라 대한제국을 찾게 된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구미 국가 수반(首班)의 가족이 내한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나라가 한참 기울어질 때의 귀빈(貴賓)이었다. 많은 기대를 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우리나라 국민의 자존심에 씻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 만다.

총을 쏘며 자녀 앨리스와 대화하는 루즈벨트. 그는 라이슐리와 모건을 가리켜 ‘해적’이라 하지만 영화는 그 역시 그들 못지 않은 ‘해적’임을 알려준다.
총을 쏘며 자녀 앨리스와 대화하는 루즈벨트. 그는 라이슐리와 모건을 가리켜 '해적'이라 하지만 영화는 그 역시 그들 못지 않은 '해적'임을 알려준다.

■ 엘리스 루즈벨트가 조선에 온 까닭은...

미국은 1905년 6월 미국 역사 상 최대 사절단을 만들어 아시아에 파견한다. 이른바 '제국 사절단(Imperial Cruise)'이다. 사절단은 규모와 내용 면에서 최대ㆍ최고로 부를 만 했다. 오늘로 치면 국방장관 격인 전쟁장관(Secretary of War)이자 이후 대통령까지 역임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단장급이다.

그 외에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그리고 그의 약혼자이자 하원 의원인 니콜라스 롱워즈(Nicholas Longworth)가 포함돼 있다. 여기에 30명 가까운 상ㆍ하원 의원과 그들의 가족 및 고위 군인 및 공무원 등이 동행했으니 그 수가 무려 100명 가까웠다.

사절단의 목적지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이었다. 대한제국은 방문 국가 리스트에 없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약혼자와 함께 개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1905년이 어떤 해인지 대충 알 것이다. 1904년 2월 시작된 러일전쟁은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치러지며 1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제국사절단'은 이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들 무렵 동아시아를 향했다. 그리고 이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한 얼마 뒤인 7월 29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됐고 약 한 달 뒤인 9월 5일 러시아와 일본 양국 간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됐다. 앨리스가 방한한 것은 이 조약 체결 약 20일 뒤인 9월 19일이었다. 그리고 약 2주간의 일정을 끝내고 10월 2일 출국한다. 이후 40일 뒤인 11월 17일 우리나라를 망국(亡國)으로 이끈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앨리스에 대한 대한제국 황실의 대접은 끔찍할 정도였다. 고종황제는 인천에 황실 전용 열차까지 보냈고 나아가 황실 관리 전원에게 양복 차림으로 그를 맞으라고 명했다. 오찬은 고종황제가 직접 대접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옆 나라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명성황후도 시해된 지 10년. 고종은 자신을 의탁하던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국의 도움을 애타게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고종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미국 대통령의 딸에게 온갖 환대를 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잘 하면 미국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는 극단적인 착각이었다. 미국이 이 사절단을 아시아에 파견한 가장 중요했던 일은 일본과의 밀약(密約)이었다. 이 밀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인정해 주고 자국은 필리핀의 점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앨리스가 일정에 없던 대한제국에 온 것은 일종의 기만전술이었다. 대통령의 딸이 방문을 함으로써 일본과의 밀약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앨리스도 미국과 일본의 비밀조약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영화에서초자 "해적을 쇠사슬로 묶어 오라"는 철없는 처녀가 대한제국과 황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주색 부츠에 승마복 차림으로, 그것도 시가를 입에 물고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을 방문, 이후 아주 유명한 사진이 된, 석마(石馬)와 석양(石羊)상에 올라 찍은 인증샷을 남겼다. 그리고 이후 회고록에서는 고종을 가리켜 "황제다운 기품이 거의 없었고 둔감하고 슬퍼보였다"고 썼다. 가슴 아픈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민비릉에서 석상을 타고 있는 앨리스 루즈벨트.
민비릉에서 석상을 타고 있는 앨리스 루즈벨트. 무례한 행동이라는 핀잔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사'에 관심이 있는 필자나 독자는 이 대화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이름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릴 것이다. 바로 J. P. 모건이라는 이름이다. 지난 번 글에서 썼듯, 1904년이면 모건은 이미 미국 최대 금융인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였다.

그런데 루즈벨트는 그를 가리켜 '해적'이라 불렀다. 그것도 "내가 아는 유일한 해적"이라며 북아프리카의 '야만적 해적'이라는 라이슐리와 대비시켰다.

루즈벨트가 모건을 '해적'이라 불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일까? 영화 속 장면 또는 내러티브가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한 생각은 역사 영화를 보면서 자주 갖게 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의문은 '우문(愚問)'이 된다.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을 뺀다면, 대부분의 영화 장면은 감독의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서, 많은 경우, 역사적 사실과의 관련성은 따질 수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다. 대신 우리는 영화의 '맥락'을 통해 감독의 '역사관'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가지 의문을 던져 보자. 우선 루즈벨트가 1904년 무렵 J. P. 모건을 '해적'이라 불렀을 개연성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있었다 치자. 왜 '작가로서의 감독'은 많고 많은 대사 중 하필 그 대사를 영화에 넣었던 것일까? 또 그 대사는 영화 전반에 걸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장면이 그의 역사관을 담지(擔持)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일까?

■ 피랍 노인이 아름다운 여성?

영화 <바람과 라이온>은 오래된 작품이다. 1975년에 만들어졌으니 벌써 45년이 넘었다. 그런데 몇 달 전 이 영화가 다시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일이 생겼다. 2020년 10월 인기 배우 숀 코너리(Sean Connery)가 사망한 때문이었다. 코너리가 바로 이 영화 <바람과 라이온>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앨리스가 "쇠사슬로 묶어 데려오라" 말했던 모로코의 족장 라이슐리 역을 맡았던 이가 그였다. 코너리의 사망을 애도하며 적잖은 언론이 이 <바람과 라이온>을 언급했던 이유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 코너리라면 누구나 제임스 본드를 연상할 테고 굳이 작품성을 따진다면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감독의 1987년 작 <언터처블>을 꼽으려 할 것이다. 이 영화로 그는 생애 유일한 아카데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출연했던 30여 편의 영화들은 제목만 들어도 적지 않은 장면이 떠오르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람과 라이온>일까?

실제 납치범 라이슐리
실제 납치범 라이슐리

장담하건데 이 영화를 제대로 봤거나 봤다 해도 제대로 기억해 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광활한 사막과 거친 말과 두건을 쓴 코너리의 모습 정도만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스터 사진 한 장만으로도 관객은 확실한 것을 하나 느낄 수 있다. 그의 남성적 매력이다. '사막'이라는 이국적 요소에 두건을 두른 그는 야만성과 강인함, 그리고 따뜻함까지 느끼게 한다. 이 영화 속 코너리는 제임스 본드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1976년 국내 개봉당시 23만명을 동원하며 해외 영화 흥행 5위를 차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영화는, 영화가 밝혔듯,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과는 꽤나 거리가 멀다. 1904년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에서 한 미국인 가족이 모로코의 한 족장에게 납치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족장의 이름이 라이슐리인 것도, 피랍 가족을 풀어주는 대가로 이것저것을 요구했던 것도 맞다. 또한 피랍 가족이 풀려난 것도, 그리고 이들이 라이슐리에 우호적이었던 것도 영화와 다르지 않다. 그뿐 아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선거로 인해 미국인 피랍 사건에 대한 국민 관심이 고조됐고 결국 미국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이해관계가 복잡했던 이 지역의 긴장이 높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들이 다르다. 무엇보다 피랍자는 남자였고 함께 납치된 가족도 아들 하나였다. 아이언 퍼디커리스(Ion Perdicaris)라는 이름의 이 사내는 1840년 생으로 납치 당시 64세의, 당시로는, 노인이었다. 그리스 주재 미국 대사였던 부친은 한때 하버드 대학 그리스어 교수로 재직했고 그 역시 하버드 대학에 진학, 명문가의 잘 나가는 청년으로 한 때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대학을 그만 두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남북전쟁이 터지자 재산을 몰수당하는 일까지 당했다. 와중에 아이 둘 가진 유부녀와 바람이 나 결국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해 모로코까지 오게 된다. 윤리ㆍ도덕적으로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인간형이다.

납치범 라이슐리와 피랍자 퍼디커리스, 이 둘을 연기한 숀 커너리와 캔디스 버겐
실제 피랍자 퍼디커리스

그를 납치한 라이슐리 역시 왜곡됐다. 영화 속 커너리처럼 남성적 매력이 있었는지, 여성과 아이에 대해서 너그러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납치 이유가 애국심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목적은 지극히 사적이었다. 그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몸값 7만 달러와 모로코에서 가장 부유한 두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했던 것이다. 미국이 대노한 것은 당연했다. 당시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은 "이 정부는 퍼디커리스가 살아 있거나 라이슐리가 죽었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납치와 관련해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그의 납치 행각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 해 전인 1903년 그는 자신의 부하 5명이 정부에 체포되자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모로코 주재 『더 타임즈』 특파원이었던 월터 해리스(Walter Harris)를 납치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납치를 통해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한 마디로 그에게 '미국인 납치'는 '수지맞는 장사'였던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같은 사실이 모두 빠져 있다. 노골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뒤죽박죽 만든 점은 아쉽다.

하지만 진짜 아쉬운 것은 다른 데 있다.이 영화를 통해 1906년의 캘리포니아 지진과 그로 인한 1907년의 공황, 공황에서 발휘된 J. P. 모건의 활약과 그가 취한 이득, 이후 추진된 비밀스러운 '연준' 설립의 배경 등 경제적 측면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납치범 라이슐리와 피랍자 퍼디커리스, 이 둘을 연기한 숀 커너리와 캔디스 버겐
납치범 라이슐리와 피랍자 퍼디커리스, 이 둘을 연기한 숀 커너리와 캔디스 버겐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영화는 미국인 일가족이 납치된 이후 석방되기까지의 몇 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진이나 경제공황 등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영화가 끝나는 시점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일들인 것이다.

확실히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심하게 왜곡했다. 영화의 주제 또한 이 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위해 이 영화를 선정한 데에는 다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연준의 설립 또는 1907년의 경제공황을 그린 영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영화가 있었다면 주저 없이 그 영화를 선택해 글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선정 이유를 이 같은 '부정적인' 데에서만 찾을 것은 아니다. 영화 선정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감독이 갖는 '작가로서의 역사 쓰기'를 중시하는 필자의 눈에 이 영화는 역사 영화의 중요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통해 연준의 설립 배경을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 루즈벨트 ... 몽둥이 든 기독교인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모건에 대한 루즈벨트의 시각이다. '해적'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불법ㆍ무법적으로 약탈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루즈벨트 또는 감독만의 독특한 인식은 아니었다. 당시 금융기관이나 금융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그랬다. 로스차일드가 피바디에게 몰래 자기홍보를 맡겼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예나 지금이나 '돈 놓고 돈 먹는' 기관이나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 등 당시 국제 자본의 활동은 일반인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비춰졌던 게 사실이다.

영화에는 모건 역할을 한 배우가 실제로 등장하는 장면도 있다. 루즈벨트 생일 축하연이었는데, 이때 건배사를 한 인물이 "파나마 운하와 모건을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영화 속 역할은, 실제와 달리, 엑스트라급으로 미미해서 분장한 배우 이름조차 앍기 어렵다. 피로연 참석자들이 줄줄이 루즈벨트를 따라 나오는 장면에도 등장하는데, 모건은 눈에 잘 띄지 않은 구석진 곳에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정치인들의 뒤를 따른다. '정치인 위, 기업인 아래'의 문화였던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

루즈벨트 생일 파티에 모인 일행들. 이 프레임 한 장에 많은 역사적 장면이 농축돼 있다. 뒷모습을 보이는 남녀가 루즈벨트 부부, 오른쪽이 앨리스, 서 있는 동양인이 다카히라 코고로, 서 있는 서양인이 모건이다.
루즈벨트 생일 파티에 모인 일행들. 이 프레임 한 장에 많은 역사적 장면이 농축돼 있다. 뒷모습을 보이는 남녀가 루즈벨트 부부, 오른쪽이 앨리스, 서 있는 동양인이 다카히라 코고로, 서 있는 서양인이 모건이다.

루즈벨트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1858년생이다. 1899년 41세 나이로 부통령이 됐고 2년 뒤인 1901년 모시던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가 3월 무정부주의자의 총격으로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대행했다.

그러다 그해 9월 대통령직을 승계함으로써 선거 없이 대통령이 됐다. 따라서 그의 정식 대통령 선거는, 1904년 퍼디커리스가 납치됐던 해 치러진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그는 190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권력욕이 강했던 그는 1913년 다시 선거에 도전했지만 윌슨(Wilson)에 패배, 마지막 꿈은 이루지 못한다.

그는 미국의 정치와 경제를 이끄는 대표적인 'WASP(백인-앵글로ㆍ색슨-프로테스탄트)'이었다. 뉴욕의 잘 나가는 사업가의 아들이었고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사회봉사와 자선에 앞장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그가 한 연설 중에는 "성경은 기독교뿐 아니라 좋은 시민권에도 필수적"이라는 말까지 있다. 또한 그에게 십계명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황금률'은 삶 전체를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WASP이었다는 점 외에도 그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이 있었다. 거칠고 강한 취미활동을 즐겼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는 총을 좋아했다. 총에 대한 관심이 특별나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시간 나는 대로 사격과 사냥을 즐겼는데, 특히 사냥과 관련해서는 '광적'이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어렸을 때 몸이 허약했던 그는 신체 단련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고 그것이 거칠고 강한 취미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는 젊은 시절 카우보이 생활까지 했다. 터프하고 거친 그의 성향을 읽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두 가지 개인 특성은 그의 정치사상과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일방적 행태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당시 약자를 속이고 정치권에 뇌물을 주면서 힘과 이익을 얻으려는 집단이 있었다. 대형 은행과 대기업이 그들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은행과 기업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1890년 제정됐지만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했던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을 적극 활용한 그로 인해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나 모건의 모던 시큐리티스 등이 철퇴를 맞았다.

루즈벨트의 ‘몽둥이 외교’를 풍자한 카툰
루즈벨트의 '몽둥이 외교'를 풍자한 카툰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된 얘기였다. 국제무대에서 그는 '약자 보호'라는 기독교 윤리 따윈 애시 당초 없었다. 세계 강국이 약국을 빼앗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하면 남에게 빼앗기는 시대였다.

그는 하루빨리 더 많은 부와 권력과 영토와 시장과 원료를 얻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원하는 '위대한 미국'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04년 선거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국제 무대를 누비는, 가차 없이 혹독한 그의 대외 정책은 세상으로부터 '몽둥이외교(Big Stick Diplomacy)'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19세기 중후반의 미국 외교정책은 '몬로 독트린'에 기초해 있었다. 일명 '고립주의'로도 불리는 이 독트린은 1823년 미국의 5대 대통령 제임스 몬로(James Monroe)가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저지하기 위해 표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19세기 후반 깨진다. 1898년 스페인과의 이른바 '미서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스페인을 쿠바로부터 몰아내고 스페인 점령지였던 필리핀을 복속시킨다. 이로써 찬란했던 스페인의 제국시대는 종지부를 찍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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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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