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00:25 (수)
중국구석구석탐색⑬唐태종과 현장법사의 대안탑
중국구석구석탐색⑬唐태종과 현장법사의 대안탑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04.10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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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 구법행 갔던 현장법사가 불경 원전의 소실 우려해 건립…24마리의 말 이끄는 수레가 불교경전 수송
그의 불경 봉송 귀국 길은 수십리 장관 연출…당 태종은 그의 귀국길 영접과 안전위해 주변국에 '총력외교'

일정을 변경해 부근의 대안탑 ( 대자은사)을 보러 갔다. 이곳은 무료가 아니고 입장료가 60위안이었고 매표소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대안탑은 바로 시안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자 구조물일 것이다. 대안탑은 현존하는 탑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고 가장 규모가 큰 당대의 사방 누각식 전탑이다. 이 대안탑 역시 2014년 카타르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8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대명궁과 함께 실크로드 문화유산에 함께 등재되었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굳건히 견디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안탑. 원래 5층 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이후 9층탑으로 다시 7층탑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됐다. 서역에서 불경을 갖고 돌아온 후 현장법사가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건설한 탑으로 중국불교의 한 상징이 되고 있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굳건히 견디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안탑. 원래 5층 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이후 9층탑으로 다시 7층탑으로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됐다. 서역에서 불경을 갖고 돌아온 후 현장법사가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건설한 탑으로 중국불교의 한 상징이 되고 있다.

이탑은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나 17년간 천축과 주변 국가를 여행하고 천축에서 불법을 연구하고 불경을 수집한 후 귀국한 현장법사가 주도하여 건립한 불탑이다. 그는 대안탑이 세워진 자은사에서 주석하면서 19년간에 걸쳐 17년 동안의 고행을 통해 수집한 불경을 한어로 번역하였다. 현장법사가 처음 세운 이 불탑은 5층탑이었으나 후대 이를 9층탑으로 개축하였고 이후에도 몇 차례 변화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현재의 7층 전탑이 되었고 높이는 64.5m에 이른다. 원래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寺務를 처리하면서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 원전이 훼손되거나 화재 등으로 소실될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안치할 장소로서 불탑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를 당 영휘 3년 (652년 ) 에 조정에 상주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 세운 탑이었다. 조정에서는 당초 현장이 올린 상주서에 30장 높이의 불탑은 공정이 거창해 완공이 쉽지 않고 또 현장법사가 탑을 건축하는 과정에 과로가 우려된다며 5층 전탑을 짓도록 하고 건축자금을 내려 보냈다. 이 불탑에는 현장이 천축에서 갖고 온 불상과 사리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봉안되었다.

현장법사 동상
현장법사 동상

현장법사는 629년 장안을 출발해 서역으로 구법행에 나섰고 17년 후인 642년 귀국 직전 인도의 불교학술회의에 초청받고 18일 동안 학술토론을 벌였으나 그의 학식과 논리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존경하는 마음에서 대승불교도는 그를‘대승천’으로 소승불교도들은‘해탈천’으로 불렀다고 한다. 불경과 불상 그리고 대량의 사리를 갖고 645년 그는 귀국했고 다음해부터 홍복사에서 3년간 역경사업에 몰두했다.

대안탑이 있는 大慈恩寺의 정문. 당태종의 아들인 태자 李治가 모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이어서 절이름이 慈恩이 되었다.
대안탑이 있는 大慈恩寺의 정문. 당태종의 아들인 태자 李治가 모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이어서 절이름이 慈恩이 되었다.

649년 자은사가 완공되고 그는 첫 주지스님이 되었다. 이곳에서 역경사업에 진력한 그는 이후 西明사를 거쳐 玉華사로 옮겼고 그곳에서 원적에 들었다.

한편 대안탑이 들어선 절 자은사는 당 정관 22년 ( 648년) 태자 李治가 생모인 문덕황후를 추념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태종의 윤허를 받아 절을 지었고 절의 이름을 慈恩寺로 명명했다고 한다. 절이 완공될 무렵 조정은 당대의 최고 고승인 현장법사를 상좌법사로 모셔 사원의 종무를 총괄하도록 했고, 그는 불교 법상종을 개창하는 한편 천축에서 가져온 불경 1335권을 번역하였다. 현장법사와 그 제자들이 자은사에 상주하였기 때문에 그가 개창한 법상종을 자은종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연유로 이곳 자은사는 중국 대승불교의 성지로 여겨졌다.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중학교 때부터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구법 여행에 나서 갖은 고행 끝에 많은 불경을 갖고 귀국,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불경원전을 한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한어로 된 서적인 노자도덕경을 산스크리트로 번역한 것도 현장법사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후 인도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이번 자은사를 참관하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현장법사의 서역 구법 여정을 그린 지도
현장법사의 서역 구법 여정을 그린 지도

중국에 정말로 하늘의 은하수처럼 수많은 고승대덕들이 명멸해갔지만 고승 중의 고승은 누구일까? 당대 대만의 불교학자 勞政武는 그의 저서‘佛學別裁’에서 수천년 중국 불교사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고승을 한명 뽑는다면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자격을 갖춘 사람은 현장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고승 가운데 고승, 최고의 고승을 현장법사로 꼽았다. 현장은 구법을 위한 서역행을 결심하고 출국 허가를 요청했으나 조정은 그의 구법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정의 출국불허 조치에 따라 당초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천축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지만 그는 초지를 꺾지 않고 몰래 관문을 통과하는 등 단신으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서역으로 갔다고 한다. 17년간 천축에서의 佛法 수련과 중간 여정을 거쳐 귀국할 때는 출국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당태종은 외교경로를 통해 서역 각국에 대해서는 귀국하는 현장법사에게 최고의 영접을 당부하였고, 당의 변경지역 지방관에게는 대사에 대한 극진한 영접을 명령하였다. 그가 갖고 오는 불경과 불상 기타 기념품은  24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의해 봉송되었고 이를 호송하는 무리의 길이가 수십리에 달했다고 한다. 연도의 백성들은 길 양편에서 그 행렬을 우러러보았고 꽃향기가 거리에 가득 찼다고 한다. 마지막 귀국길에는 황제가 친히 시안성 밖에서 대사를 영접하였고 극진한 귀국환영연이 베풀어졌다. 당태종은 조정차원에서 대사의 역경사업을 돕기 위해 대사가 가져온 경전을 번역하는데 필요한 모든 인력과 物力을 조정에서 충분히 공급하라고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현장은 귀국 27일부터 역경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런 사업은 20년간 줄곧 유지되었으며 그가 임종에 들기 27일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빼어난 식견 뿐만 아니라 높은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 인품을 존경한 당태종이 몇 차례 대사에게 최고위 관료직을 제안하면서 자신의 곁에서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당나라 시기 왕궁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 주춧돌만 남았고 다른 당제국의 흔적을 완형 그대로 유지한 것을 찾을 수 없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대안탑은 그 모진 역사의 시련 가운데서도 우뚝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비해 종교의 힘이 약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강하고도 길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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