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25 (금)
고종의 특명 “하늘 아래 제일 가는 은행을 만들라”
고종의 특명 “하늘 아래 제일 가는 은행을 만들라”
  • 김승희 이코노텔링 기자
  • lukatree@daum.net
  • 승인 2019.02.20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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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

창립 120주년된 우리은행 모태인 '대한천일은행'
조선왕실, 상권침탈 일본에 맞서 은행설립 마중물
영친왕은 황실 주주 자격으로 2대 은행장에 취임
오늘날 우리은행의 모태인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을 허가해 달라고 발기인 주주들이 탁지부 대신에게 보낸 청원서이다.그 내용은 이렇다. “화폐융통(자금의 유통)은 상무흥왕(商務興旺·기업활동이 왕성하다)에 본(本·기본)이기로, 본인이 은행을 창립코저 하여 자본금을 구취(九聚·모으다)하고 은행 호(號·이름)는 대한천일은행이라 칭하고 본점은 황성(서울)에 설(설·세우다)하옵기에 자(玆·이에) 청원하오니 조량(照亮 ·잘 살피다) 인허(認許·허가)하심을 망(望·바라다)하나이다. 1899년(광무3년) 1월22일”
오늘날 우리은행의 모태인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을 허가해 달라고 발기인 주주들이 탁지부 대신에게 보낸 청원서이다.그 내용은 이렇다. "화폐융통(자금의 유통)은 상무흥왕(商務興旺·기업활동이 왕성하다)에 본(本·기본)이기로, 본인이 은행을 창립코저 하여 자본금을 구취(九聚·모으다)하고 은행 호(號·이름)는 대한천일은행이라 칭하고 본점은 황성(서울)에 설(설·세우다)하옵기에 자(玆·이에) 청원하오니 조량(照亮 ·잘 살피다) 인허(認許·허가)하심을 망(望·바라다)하나이다. 1899년(광무3년) 1월22일"(사진1)

"하늘 아래 제일가는 은행을 만들라."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만인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와 근대국가 개혁에 팔을 걷었다. 연호를 광무(光武)라 칭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지었다. 황제가 된 고종은 자주 국가의 틀을 하나 하나씩 만들었다. 그 개혁 작업중의 하나가 민족은행의 설립이었다.

일본 상인들이 일본은행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조선의 상권과 유통망을 장악해 나가자 일본의 경제침탈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고종은 특명을 내렸다.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민병석 대신이 앞장섰고 조선 상인의 대표적 단체인 육의전(六矣廛)의 상인 등 75명이 주주로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은행이 바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이다.

이 은행의 설립 흔적은 서울 회현동에 있는 우리은행의 '은행사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늘날 재경부 격인 조선황실 탁지부에 낸 은행설립 청원서<사진1>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대한천일은행의 좌목, 즉 주주명부이다. 제일 앞에 영친왕이 올라있다. 고종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설립의 마중물을 넣은데 이어 조선 황실이 이 은행에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대한천일은행의 좌목, 즉 주주명부이다. 제일 앞에 영친왕이 올라있다. 고종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설립의 마중물을 넣은데 이어 조선 황실이 이 은행에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이다.(사진2)

"화폐융통(자금의 유통)은 상무흥왕(商務興旺·기업활동이 왕성하다)에 본(本·기본)이므로, 본인이 은행을 창립코저 하여 자본금을 구취(鳩聚·모으다)하고 은행 호(號·이름)는 대한천일은행이라 칭하고 본점은 황성(서울)에 설(設·세우다)하옵기에 자(玆·이에) 청원하오니 조량(照亮 ·잘 살피다) 인허(認許·허가)하심을 망(望·바라다)하나이다. 1899년(광무3년) 1월22일"

이근호 등 발기인 6명이 연서(連書)로 탁지부(度支部) 대신에게 제출했고 탁지부 대신의 날인이 찍혀있다.

이에 따라 고종은 황실의 사재(私財)인 내탕금 3만원(元) 쾌척해 은행설립의 마중물을 넣었고 여기서 더 나아가 1902년에는 황실이 직접 자본을 출자하여 주주가 됐다. 초대 민병석(황실 재무대신) 행장에 이어 황태자인 영친왕이 2대 은행장에 취임했다. 대한제국의 황실이 대한천일은행경영에 참여한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이라는 은행명에도 극일(克日)정신이 담겨있다. 일본 제일은행을 의식해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대한천일은행의 좌목(座目·주주명부·사진2)에는 황태자인 영친왕(英親王) 전하를 비롯해 민병석(閔丙奭), 민영기(閔泳綺), 이근호(李根澔) 등 대주주 명단이 올라있다. 그해 5월에는 우리나라 금융기관 최초의 지점인 인천지점을 열었다. 은행설립 10년만인 1909년에는 종로에 광통관이라는 번듯한 본점 건물<사진 3>에 들어갔다. 대한천일은행은 예금과 대출업무를 담당하는 일반은행의 역할은 물론 통화랑 조절과 황실 및 주요기관의 재정업무를 처리해 '중앙은행'으로써의 역할을 했다.거래고객 또한 조선 상인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일본 상인, 청나라 상인 등과도 거래했다. 1904년 간행된 미국의 외교관 알렌의 저서 '사실과 공상'(KOREA : Fact and Fancy〉을 보면 1896 무렵, 서울에 자전거 열풍이 불었고 천일 은행이 설립됐다고 쓰여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광통관(廣通館). 오늘날 정부재정을 담당하는 재경부 격인 탁지부가 금융기관의 집회장소로 쓰기위해 1909년 건설했다. 대한천일은행의 어음조합이 사옥이 필요하게 되자 이 광통관건물을 빌려줬다고 한다. 1914년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되자 지붕과 각 부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건설당시 모습(사진 왼쪽)과 다르다.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지점 영업장(오른쪽)으로 쓰이고 있다. 입구 위부분에는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라고 새겨져 있어 일제 강점기에도 종로지점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건물은 서울 종로에서 을지로 사이에 있었던 다리(광통교) 옆에 있다고 해서  ‘광통관’으로 이름이 지었다는 설과 여러 금융기관끼리 폭넓게 소통하자는 의미로 광통관으로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광통관(廣通館). 오늘날 정부재정을 담당하는 재경부 격인 탁지부가 금융기관의 집회장소로 쓰기위해 1909년 건설했다. 대한천일은행의 어음조합이 사옥이 필요하게 되자 이 광통관건물을 빌려줬다고 한다. 1914년 화재로 인해 일부가 소실되자 지붕과 각 부위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건설당시 모습(사진 왼쪽)과 다르다.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지점 영업장(오른쪽)으로 쓰이고 있다. 입구 위부분에는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라고 새겨져 있어 일제 강점기에도 종로지점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건물은 서울 종로에서 을지로 사이에 있었던 다리(광통교) 옆에 있다고 해서 '광통관'으로 이름이 지었다는 설과 여러 금융기관끼리 폭넓게 소통하자는 의미로 광통관으로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사진3)

알렌은 의료 선교사로 들어온 이후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이등서기관,대리공사를 거쳐 전권공사로 일했다. 21년간 조선에 체류했다.

이 대한천일은행이 바로 올해 창립 120주년이 된 우리은행의 모태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일본의 조선 강점기에 조선상업은행으로 바뀌었다가 해방이후 한국상업은행-상업은행으로 잇따라 간판을 바꿨다. 1997년에 터진 '국가부도의 날' 외환위기로 인해 국내 은행권에 찬바람이 불면서 상업은행은 다시 거듭난다. 은행 통폐합의 중심에 서서 한일은행을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재탄생했다가 나중에 평화은행 등을 더 흡수해 우리은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무렵 우리금융지주회사를 세우고 한빛은행,평화은행, 광주은행,경남은행, 하나로종합금융 등 5개 금융회사를 자회사로 편입했다.

우리은행은 모체인 대한천일은행 설립 105 주년을 맞은 2004년 7월 서울시 중구 회현동1가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의 지하 1층에 '우리은행 은행사 박물관'을 만들어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은행역사관·홍보관·기획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별장 모양의 이 저금통은 1890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수공예품이다. 집 모양을 세세하게 구현해 마치 정교한 조각작품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별장 모양의 이 저금통은 1890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수공예품이다. 집 모양을 세세하게 구현해 마치 정교한 조각작품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사진4)

은행역사관은 근대 은행의 출현부터 일제강점기의 금융사, 광복과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 경제 개발기와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은행들이 걸어온 발자취와 관련한 유물과 역사자료, 영상물을 갖췄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대한천일은행의 은행 회계장부이다. 송도차개치부법으로 기재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장부이다. 개성상인들의 부기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현재의 총계정원장에 해당하는 이 회계장부는 우리나라 전통 회계방식이 오래전부터 서양의 복식회계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 층을 더 내려가면 저금통갤러리가 있다. 저금통갤러리에는 1890년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별장 모양의 저금통<사진 4> 등 다수의 국내외 저금통을 전시해 어린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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