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역사관은 중소기업의 본산인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 없다.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있다. 마포구 상암로 189번지 중소기업DMC타워 안에 둥지를 틀었다. 이 역사관은 60년대초 선경직물의 광목 천에서부터 첨단 IT제품 부품에 이르기까지 중소기업의 생산품목을 시대별로 나눠 정리했다. 홍진크라운(HJC) 등 세계 일류화 제품도 자랑스럽게 놓여있고 여전히 사랑받는 쓰리세븐의 손톱깎기 세트도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중소기업제품만 뽑혔다. 이곳에서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숱한 중소기업이 눈물을 머금고 문을 닫았던 외환위기 때의 흔적이다.
바로 중소기업들이 물건을 납품하고 받은 어음들이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상업은행,제일은행 등이 발행한 부도 어음들이 수북이 놓여있다. 21년전 외환위기 때 이 어음들이 휴지 조각이 되는 바람에 여러 명의 중소기업인이 목숨을 끊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이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외국자본이 빠져나가자 허둥대는 정부와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장면을 집중 조명했다. '기초(펀더멘탈)가 튼튼하니 걱정없다"말해놓고선 뒤에선 국제통화기금(IMF)과 달러를 빌리는 협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인용 MBC앵커는 비감어린 어조로 "우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경제는 IMF의 법정관리를 받게됐다. 오늘은 국치일"이라고 일갈했다.
강관 도매상을 하던 한 중소기업인은 건설현장에 파이프를 납품했다가 한 푼도 못 건졌다. 70억원 어치의 대금을 못받아 평생 모은 재산이 날아갔다. 거제에서 올라와 큰 돈을 모았던 그는 너털 웃음을 보이며 “그 때 창고에 있던 20억원어치가 량의 파이프를 업자에 넘겼으며 몇억이라도 건질 수 있었으나 그것을 빚쟁이들에게 넘겨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울시 강동구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하는 K씨(72)는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말했다.중소기업 역사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자취도 있다. 1967년 제3회 중소기업자대회에서 박 대통령의 치사 원고가 그대로 보관돼 있다. 200자 원고자에 써내려 간 연설내용에는 ‘자주경제’란 단어와 (경제에)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이란 단어가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정부나 정권은 없었다. 대기업과의 거래 관행은 예전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 현금결제 비중도 늘었고 어음거래관행은 크게 줄었다. 하지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일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의 기술이나 인력을 빼가는 일이 있다. 그런 대기업은 법의 심판을 꼭 받아야 하고 중소기업과 협력이 잘되는 대기업에겐 상을 줘야 한다.
기술과 아이디어 없이 그냥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로 보호받는 세상은 이미 지났다. 당당한 중소기업, 그리고 경쟁이라는 틀 아래서 살아남는 중소기업과 이들의 경영생태계를 돕는 대기업들도 적잖다. 그런데 대·중소기업 관계에 인위적으로 정부가 끼어들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꼬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홍종학 장관이 꺼낸 “협력이익공유제‘와 같은 게 시장에 나쁜 신호를 주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기업들은 이익이 되는 쪽으로 거래를 한다. 그 물줄기를 돌리려면 이곳 저곳 찔러볼 것이 아니라 아예 헌법을 바꾸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노인 일자리를 하나 얻어 중소기업역사관 입구에서 안내를 하는 정정희씨는 "역사관이 조금 외진 곳에서 있어서 관람객들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라며 "가끔씩 단체학생 관람과 주말 예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들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