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6:45 (금)
뉴욕을 만든사람들㉔ 美방송史 전설 '설리반'
뉴욕을 만든사람들㉔ 美방송史 전설 '설리반'
  •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9.12.05 21: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예부 기자출신으로 시청자 관심 있는 인물 폭넓게 초청
비틀즈와 엘비스프레슬리도 '설리반 쇼'서 도약발판 마련
시청률 45%는 이직도 안깨져…프로그램 시간 범죄 줄어

23년간 매주 일요일 밤, 미국 국민의 시선을 모았던 사나이. 버라이어티 쇼의 틀을만들었고 TV 프로그램 퀄리티를 한 차원 더 높인 방송인. 미국 방송사의 한 획은 그은 에드 설리반(Ed Sullivan)이다.

그는 1901년 뉴욕 할렘 인근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렘은 요즘과 달랐다. 지하철이 뚫리기 시작한 1910년쯤 이후부터 슬럼화가 시작되었으니, 그가 태어난 시점에는 뉴욕의 중산층들이 살던 그런대로 한적한 동네였다.

1969년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비틀즈 모습 . 미국 시청자들은 그 때 비틀즈를 처음 접했다. 사진=CBS 방송화면.
1969년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비틀즈 모습 . 미국 시청자들은 그 때 비틀즈를 처음 접했다. 가운데가 설리번이다. 사진=CBS 방송화면.

조금 더 설명하면, 1904년 개통된 뉴욕의 지하철이 할렘으로 더 들어오면서 할렘의 슬럼화는 가속됐다.  아이러니하다. 도시화의 확산으로 편리한 시스템이 들어왔는데 왜 슬럼화되고 저소득층 흑인들의 마을로 전락했을까.

우리는 역세권 아파트가 비싼데 미국은 다르다. 지하철이 닿는 곳은 못사는 동네의 상징이다. 삶이 빠듯한 사람들이 유일한 교통수단이 지하철이기 때문이다.

중산층 이상은 자가용을 몰고 다니지만 하층민들은 전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도 부촌 동네인 롱아일랜드 등에는 지하철을 그곳까지 연장한다면 모두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 어쨋든 인간의 욕심과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 할렘은 전철 개통이후 100년간 ‘빈자의 마을’이란 오명을 벗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야 겨우 개발 붐이 일어 서서히 동네의 땅값이 꿈틀대고 있다.

설리반은 처음에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연예부 기자로서 일했다. 그러다가 방송 관련된 일도 하면서 자연스레 방송사 쇼 이벤트를 제작과 호스트로서 진행을 맡는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처음 방송에 나선다. 1948년이다. 그의 나이 47살.

처음 그의 방송프로그램 이름은 'Toast of the Town'였다. 시청자의 인기를 끌자 아예 1955년도에 프로그램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 '에드 설리반 쇼'로 바꾼다.

그는 순발력있고, 연예부기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연예계 구석구석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이 우선 강점였다. 나아가 출연진 섭외 등에서도 탁월했다. 그는 버라이어티 쇼 운영에 누구보다 적합한 자격을 갖췄던 셈이다.매주 일요일밤 미국 전역에 수천만명 시청자를 끌어 모은 미국 역사상 최대 인기 버라이어티 쇼는 그렇게 탄생했다.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엘비스 프레슬리(오른쪽).프레슬리가 엉덩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자 미국 기성세대를 경악한다. 그러나 프레슬리의 출연으로 방송의 춤 규제가 없어졌다. 사진=1956년 CBS방송화면.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엘비스 프레슬리(오른쪽).프레슬리가 엉덩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자 미국 기성세대를 경악한다. 그러나 프레슬리의 출연으로 방송의 춤 규제가 없어졌다. 사진=1956년 CBS방송화면.

그의 쇼에는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등장한다. 가수, 록큰롤 그룹, 배우, 코미디언 등이 폭넓게 나왔다. 더구나 인종차별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던 당시에 우리가 잘 아는 흑인 가수들이 초청됐다.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스프림, 마이클 잭슨의 어린시절 그룹인 잭슨 파이브. 수많은 방송관계자들과 협찬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출연을 관철시켰다.

반전 운동 음악가는 물론 퇴폐적이고 외설적인 그룹 등 시청자의 눈밖에 난 인물도 프로그램에 등장시킨다. 롤링 스톤즈, 제니스 조플린, 도어스 등 젊은이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기성 세대들이 외면했던 음악스타들은 그의 쇼에서 도약을 발판을 마련했다.

예술성이냐 퇴폐냐의 판단은 자신이나 방송사의 몫이 아니라고 그는 믿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판단은 시청자들에게 넘겼다. 체구는 작지만 그의 속마음엔 태평양 같은 거대한 관용과 묵직함이 들어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가장 각광을 받은 계기는 1957년도 엘비스 프레슬리 출연이었다. 현란하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노래 부르는 가수를 미국 시청자들은 처음 접했다. 전파를 타자 미국 전역을 혼동속으로 집어넣었다. 엘비스 출연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43%로 미국역사상 최대기록이다. 시청자는 600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성세대들은 술렁거렸다. 윤리적인 문제가 심각할 것으로 우려했다. 하지만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TV 방송에 허리 아래로 춤을 추는 규제가 무너진다. 한 사람의 가수와 미디어가 한 나라의 문화의 장벽을 허물었다.

1964년 역시 비틀즈 역시 '에드 설리반'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국 시청자들과 처음 마주한다. 당시 비틀즈 멤버들은 "우리는 에드 설리반을 몰랐고 쇼를 본 적도 없었다. 설리반도 우리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신사 숙녀 여러분, 비틀스입니다"라는 소개 고전적인 멘트가 인상적였다고 비틀즈 멤버들은 당시 속으로 웃었다고 한다. 이 프로는 미국 방송 역사상 최고 시청률로 지금도 남아있다. 시청률은 45%, 시청자수는 약 7400만명이 넘었다. 당시 전 미국인구의 40%가 시청한 셈이다. 그 다음주에 연속으로 등장한 두 번째 출연 때도 44% 시청률을 기록한다.

사람들이 TV 시청에 몰두하느라 당시 "뉴욕은 물론 미국 전역에서 폭력과 범죄가 줄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예에전 '아씨' '여로' '사랑이 뭐길래' 등 인기 tv 방송시 서울시내 가정 수도물 사용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과 비슷한 사회현상이다.

이 기록은 전무하고 후무할 것 같다. 요즘은 야구와 축구 등 인기 스포츠경기를 여러 채널에서 동시 중계 등을 할 수 있어 시청자 절대수가 많은 프로그램이 있을 수 있으나, 한 곳의 방송사에서 한 개의 프로그램이 세운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에드 설리반 쇼는 우리와도 인연이 있다. 바로 김시스터즈가 처음 거기에 명함을 내밀었다. ‘아사아의 드림 걸’로 꼽혔던 김시스터즈(이민자, 김숙자, 김애자)는 1959년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한데 이어 ‘에드 설리반쇼’에 수 차례나 출연했다. 나중엔 ‘목포의 눈물’을 불렀던 어머니 이난영도 함께 출연한 적도 있다.다.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는 이들은 1962년 ‘챨리 브라운’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6위까지 오른다. 그녀들의 ‘김치깍두기’ 가사의 친근성과 그 화음으로 미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설리반의 인기비결은 그의 독특한 자세와 질문이다. 어깨가 올라간 엉거주춤한 자세와 코맹맹이 섞인 보이스로 템포 있는 질문 속도가 우선 남달랐다.

그는 쇼 사회자로선 그다지 멋진 외모는 아니지만 그의 질문은 독특했다. 출연자들을 대상으로 속사포처럼 쏘듯이 이상한 질문을 한다 거나 코믹한 장면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질문이 시청자들을 긴장시키고 흥분시켰다.

누구나 그의 쇼에 출연하면 하루 밤 사이에 스타가 됐다. 그의 프로는 '스타’의 산실이었다. 그는 연예인을 보는 감각과 섭외력이 뛰어났다. 그는 시청자들이 궁금해 할만한 사람을 출연시켰다. 그걸 그는 알았다. 그렇기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23년간 이쇼를 통해 출연한 연기인들은 1만명이 넘었다.

그의 쇼가 인기를 끌자 ‘짝퉁’ 쇼 프로그램들도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이름까지도 비슷하게 만든 쇼 프로들이 선을 보인다. '에드 솔로몬' '에드 설리스톤' 에드 실리안' 등의 이름 등으로 패러디한 프로가 쏟아졌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도태됐다.

설리반은 1971년 시청률이 급락하면서 하차했다. 화가 나 고별 방송의 출연까지 거부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의 취향에서 멀어진 음악 중심의 버라이어티 쇼는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는 방송사와의 마지막 출연후, 얼마안된 1974년 식도암으로 사망한다.

그는 평소 수상스키어가 되고 싶어했다. ‘만약 돈을 정직하고 존엄하게 벌었다면...' 애매한 말을 남기면서, '나는 항상 내가 하는 일을 즐기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효령로 229번지 (서울빌딩)
  • 대표전화 : 02-501-638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재열
  • 발행처 법인명 : 한국社史전략연구소
  • 제호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 등록번호 : 서울 아 05334
  • 등록일 : 2018-07-31
  • 발행·편집인 : 김승희
  • 발행일 : 2018-10-15
  • 이코노텔링(econotelling)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코노텔링(econotelling).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unheelife2@naver.com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장재열 02-501-6388 kpb11@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