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후 만주사변에 중일전쟁,태평양전쟁까지 연결
메이지유신으로 내부 안정을 꾀한 일본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뭘까? 경제발전 추진? 국방력 강화? 아니다. 메이지 정부가 가장 먼저 시도했던 일은 대만침략이었다. 그럼으로써 봉토를 빼앗긴 옛 봉건영주 다이묘(大名)들과 사무라이 무사계급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대외 침략이 일본 근대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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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시작된 대공황을 일본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또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겠다며 대공황 발발 이후 일본을 들여다본다면 분명한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1920년대 내내 일본을 옭아맸던 정치ㆍ경제적 사건들이 즐비한 탓이다. 복잡다단한 일본의 1920년대를 모르고서는 결코 1929년 촉발된 대공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게다가 1930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후 만주사변에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연결된다. 1929년 대공황이 일본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럼 '대공황과 일본'이라는 주제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론은 이렇다. 1920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25년의 시간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이 25년이 어떤 25년인가. 일본 한 나라만 봐도 더 이상이 있을까 생각될 만큼 격동적인 시기다. 중국은 어떤가. 일본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등장해 파시즘이라는 극우정치의 새 면모를 보여줬다.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 전체를 훑어봐도 이만큼 역동적이었던 시기는 찾기 힘들 것이다.
이 길고 복잡한 기간을 읽을 수 있는 영화는 무엇이 있을까? 일본 얘기니만큼 일본영화가 우선적으로 검토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별 게 없다. 우선 25년이라는 긴 기간을 다룬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사건 중심의 영화는 여러 편 있다. 그중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원폭 영화 세 편이 눈길을 끌지만 앞서 말했던 대로 역사관의 문제가 크다. 구미 또는 중국 영화는 많다.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 특히 진주만공습 관련 영화를 보라. 하지만 대부분 사건사 중심이다. 훌륭한 영화들이기는 해도 25년이라는 장시간 역사를 훑어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 아카데미상 9개 수상 '명성'
우리가 베리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1987년 작(한국 개봉은 1988년)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를 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청조(淸朝)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의 삶을 조명하는 이 영화는 역사의 아주 긴 기간을 커버한다. 1905년생인 푸이가 황제로 등극한 해는 1908년. 영화는 1967년 사망한 그의 마지막 삶까지 들여다본다. 무려 60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대공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보기 위한 기간 25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니냐고? 맞다. 일본 역사를 얘기하는데 왜 중국 배경의 영화냐고?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의 1920~45년까지의 긴 역사를 보기 위한 일본 배경의 영화가 없다는 점, 둘째, 동년기(同年期) 일본 역사는 중국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 따라서 중국 역사를 통해 일본 역사를 보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 셋째, 영화사에 남을 거장(巨匠)이 만든, 영상 미학적 관점에서도 탁월한 영화라는 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또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는 점 등이다.
우선 감독과 영화에 대한 평가를 보자. 2018년 11월 2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한 베루톨루치 감독에 대한 『더 가디언(The Guirdian)』의 당일 부고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 <마지막 황제>로 그는 가장 큰 국제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 <마지막 황제>는 그해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포함, 모두 9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영화도 감독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아카데미 역사에서 <벤허>(11개)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0개)에 이어 <지지>(9개)와 공동 3위를 기록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감독'이라는 말에도 눈길이 간다. 사실, 어린 시절 그가 가려 했던 길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는 1941년 이탈리아에서 시인이자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아버지 아틸리오 베르톨루치(Attilio Bertolucci)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꼬마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 정식으로 시집을 내 화제를 불러 모았던 것. 대학에서도 문학을 전공해 주변에서는 본인이 원하던 시인으로서의 길을 계속 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시에 머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했던 것이다. 나이 열다섯에 이미 16mm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등 이 방면에서도 비범함을 보였다. 정식으로 영화에 입문한 것은 대학시절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하면서다. 1960~7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한 감독 파솔리니는 베르톨루치와 닮은꼴이었다. 그 역시 감독 데뷔 이전 시인이자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던 인물. 1962년 개봉된 베르톨루치의 데뷔작 <냉혹한 학살자(La commare secca)>가 파솔리니의 소설을 영상화한 것도 이 같은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마지막 황제> 이전에 이미 여러 편의 화제작을 만들어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인물이었다. <냉혹한 학살자> 이후 <혁명전야(1964)>, <컨퍼미스트(1970)>,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1900년(1976)>, <루나(1979)>, <바보 같은 자의 비극(1981)>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정적인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워낙 화제를 불러일으켜 여성영화나 애정영화 전문가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영화 중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영화도 많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컨퍼미스트>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1900년>에서는 좌우갈등 등 정치적 이슈가 주제였다.
영화 <마지막 황제>가 최초 개봉된 것은 1987년. 1981년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바보 같은 자의 비극(La tragedia di un uomo ridicolo)>이 발표되고 6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1980년대 초 <바보 같은 자의 비극>의 제작을 마친 직후 선통제 부의가 쓴 자서전 『나의 반생(我的前半生)』을 읽고 그에 대한 영화 제작을 꿈꿨다고 한다. 이전까지 짧으면 한 해 두 편, 길어야 3년 기한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그였다. 영화 준비에 6년이란 세월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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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