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21:25 (화)
중국구석구석탐색(60)절세美人'왕소군'의 비운
중국구석구석탐색(60)절세美人'왕소군'의 비운
  • 홍원선 이코노텔링 대기자(중국사회과학원박사ㆍ중국민족학)
  • wshong2003@hotmail.com
  • 승인 2019.10.20 21: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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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미인에 꼽히지만 화평위해 흉노족 왕에게 시집간 '궁녀'의 운명
떠날 때 비로서 美人 확인 한 漢의 원제는 그림으로만 간택 한 것 후회해
畵圓들에게 뇌물 안 줘 얼굴 곱게 그려 주지 않아 황제와 만날 기회 놓쳐
'흉노行' 자청해 60년간 평화지킨 화신이란 '아름다운 이야기' 후세 회자
후허하오트 근교에 있는 왕소군의 무덤, 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는 소군박물관의 입구 모습. 왕소군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최고 미인 4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여성으로 한족의 가정에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하고 다시 흉노의 왕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된 사람이다. 그가 한족의 땅에서 이민족인 흉노에게 시집간 후 약 60년간 한과 흉노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당시 이 지역을 살았던 사람에게 소군은 바로 평화를 가져온 사람에서 나중에는 선녀로, 신으로 격상된 인물이기도 하다.
후허하오트 근교에 있는 왕소군의 무덤, 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는 소군박물관의 입구 모습. 왕소군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최고 미인 4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여성으로 한족의 가정에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하고 다시 흉노의 왕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된 사람이다. 그가 한족의 땅에서 이민족인 흉노에게 시집간 후 약 60년간 한과 흉노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당시 이 지역을 살았던 사람에게 소군은 바로 평화를 가져온 사람에서 나중에는 선녀로, 신으로 격상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로서 여행이 반환점을 돌고 내일부터는 여행시간이 줄어든다. 아쉽기보다는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내일은 하얼빈으로 들어가 후룬베이얼 초원이나 대륙의 최북단 지역인 모허를 둘러볼 작정이다. 오전에 호텔 로비에서 여행사에 부탁해둔 하얼빈행 비행기표를 받다. 항공료는 1050위안이다. 어제 저녁 항공료시세를 처음 문의했을 때 제시된 가격 1480위안에 비해 3분의 1가량 대폭 가격이 낮아졌다.

오늘이 이곳 후허하오트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더욱 부지런히 다녀야 할 것 같다. 우선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자 흉노왕의 왕비로 살아야 했던 왕소군의 묘를 참관해 보기로 했다. 호텔직원이 일러준 시내버스를 탔으나 그가 일러준 곳은 어제 들렀던 대소사였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지나가는 노신사에게 소군묘를 묻자 6번 노선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라고 한다. 곧 6번 버스가 왔고, 이 버스는 종점까지 그냥 일직선으로 달렸다. 종점은 바로 유료국도의 톨게이트이기도 했다.

소군박물관 내부 소군 묘에 이르기 전에 보이는 대리석으로 깎은 왕소군의 조각상. 실제 그 인물이 출중했겠으나 지금 이 시점 중국인의 조각 장인이 그리는 최고의 미인상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현대식 표준에 아주 부합하는 미인 인물상이라 여겨진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에 약간 서구적인 얼굴 모습 등등.
소군박물관 내부 소군 묘에 이르기 전에 보이는 대리석으로 깎은 왕소군의 조각상. 실제 그 인물이 출중했겠으나 지금 이 시점 중국인의 조각 장인이 그리는 최고의 미인상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현대식 표준에 아주 부합하는 미인 인물상이라 여겨진다. 큰 키에 늘씬한 몸매에 약간 서구적인 얼굴 모습 등등.

그러나 주변에 소군묘는 보이지 않았다. 톨게이트에 근무하는 교통경찰에게 소군묘의 위치를 물었더니 유료도로를 1km쯤 걸어가면 소군묘가 있다는 것이다. 약 1km라는 그의 말과는 달리 1.5km의 제법 먼 거리를 걸었다.

주변에는 나무도 별로 없고 머리 위에는 태양빛이 작열했으나 약간의 바람이 불어줘 그나마 걸을 만 했다. 절반쯤 걸었을까 멀리 기와지붕을 한 거대한 건축물군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이 바로 소군묘였고 입장료가 65위안이다. 그녀의 묘는 묘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었다. 그것도 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야산의 모습이었다.

소군박물관 내부에 있는 ‘흉노문화박물관’ 입구모습. 그 외관이 흉노족들의 거대한 빠오 컨셉으로 지어졌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상징하는 거대한 빠오이다.
소군박물관 내부에 있는 ‘흉노문화박물관’ 입구모습. 그 외관이 흉노족들의 거대한 빠오 컨셉으로 지어졌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상징하는 거대한 빠오이다.

왕소군은 바로 한족과 흉노족의 화평의 상징인 중국 사대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녀는 원래 양가의 자제로 궁실의 궁녀로 입궁하였고 입궁 후 그의 지위는 낮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입궁한 궁녀의 꿈이란 바로 최고권력자인 황제의 눈에 들어 선택받는 것이나 그는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당시 황제는 수많은 궁녀를 직접 대면하여 후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궁정 화원에게 궁녀들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보고 선택에 참고했다고 한다. 당연히 궁녀들 간에는 궁정화원에 잘 보이기 위해 뇌물경쟁이 벌어졌다. 이를 못 마땅히 생각한 소군은 전혀 뇌물을 건네지 않았으며 그의 초상화는 당연히 밉게 그려져 황제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소군박물관 내부에 있는 ‘흉노문화박물관’ 입구모습. 그 외관이 흉노족들의 거대한 빠오 컨셉으로 지어졌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상징하는 거대한 빠오이다.
소군박물관 내부에 있는 ‘흉노문화박물관’ 입구모습. 그 외관이 흉노족들의 거대한 빠오 컨셉으로 지어졌다. 왕이 거주하는 왕궁을 상징하는 거대한 빠오이다.

그러나 왕소군이 흉노의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됐을 때 한의 원제는 처음 그녀를 친견하게 되었고 미모에 찬탄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사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원제는 후궁을 선택하면서 화원이 그린 그림에만 의존했던 자신의 방식을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3년 왕소군은 한족과 흉노족의 화평과 우호를 위해 흉노로 갈 것을 청했고, 화친의 사자가 되어 변방을 넘어 흉노의 땅으로 들어갔다며 중국의 역사는 이를 아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중국 역사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민족간의 화평과 우호란 명목으로 변경을 넘었으나 그들의 뒷 얘기는 역사무대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왕소군의 스토리는 예외적으로 이렇게 아름답게 후대에 전해져 오고 있다. 어쨌건 왕소군이 변경의 땅으로 떠난 후 60여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한족과 흉노간에 전쟁은 없었고 화평이 유지되어 전장터의 주민들에게 왕소군에 대한 기억은 점차 윤색되었다.

그녀는 중국 최고의 미녀에 더해 한족과 흉노족 간의 화평의 상징이 되고 급기야 평화를 가져온 선녀로 변신하였다.

소군묘를 제법 멀리서 전체 모습을 촬영한 사진. 겉으로 보면 평범한 야산처럼 보이나 묘지 하단에 구조물이 처리되어 있어 그냥 야산이나 언덕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전면의 검은색의 기마상엔 흉노의 선우 왕과 바로 뒤에 왕소군이 함께 앉아있다.
소군묘를 제법 멀리서 전체 모습을 촬영한 사진. 겉으로 보면 평범한 야산처럼 보이나 묘지 하단에 구조물이 처리되어 있어 그냥 야산이나 언덕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전면의 검은색의 기마상엔 흉노의 선우 왕과 바로 뒤에 왕소군이 함께 앉아있다.

왕소군의 묘는 거대한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소군과 흉노의 선우가 함께 한 기마동상, 그리고 흉노족의 문물을 간략히 소개, 전시하는 흉노박물관 등이 배치되어 있다. 역사공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소군의 묘는 겉으로 보자면 거친 하나의 야산이지만 보통 야산과 다른 점은 묘의 하단 부분이 비석들로 둘러쌓여 있다는 점이다. 소군 묘지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색적인 것은 묘지 한켠에 소군불당이 세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소군은 죽어 소군보살이 되어 후세인들의 神佛로 숭앙되고 있었다. 거의 보통사람의 키 높이 정도의 불당높이와 2, 3명이 들어서면 거의 꽉 찰 듯한 자그마한 석실 불당이었다. 중국인의 종교세계에서 신과 인간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

일신론이 지배하는 서구문화와는 아주 대조된다. 살아 생전에 공덕을 많이 베푼 사람들은 죽으면 신령이 되는 경우를 중국에서 너무나 쉽게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신앙에 의해 혹은 아름다운 기억에 의해 왕소군은 영생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그가 전쟁의, 살육의 변경에 오랜 시간 화평을 가져온 평화의 화신이란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그에 대한 숭배가 종교의 경지로 격상된 것이리라.

후허하오트 시내의 오탑사 모습. 원래 탑의 명칭은 ‘금강좌 사리보탑’이었다. 탑신이 하나가 아닌 5좌의 사리탑으로 이뤄져 있고 이후 사리탑이란 말이 생략되면서 그냥 오탑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탑의 높이는 16m에 이르고 탑을 쌓아올린 소재는 구운 유리벽돌이다. 탑신 하단에 한어와 몽골문자 만주문자의 3종언어로 금강경의 경문이 새겨졌고 상층부에는 수천에 이르는 작은 불상이 탑체를 돌아가며 들어서 있다. 이탑은 비교적 근세의 것에 해당하는 청조 옹정 연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후허하오트 시내의 오탑사 모습. 원래 탑의 명칭은 ‘금강좌 사리보탑’이었다. 탑신이 하나가 아닌 5좌의 사리탑으로 이뤄져 있고 이후 사리탑이란 말이 생략되면서 그냥 오탑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탑의 높이는 16m에 이르고 탑을 쌓아올린 소재는 구운 유리벽돌이다. 탑신 하단에 한어와 몽골문자 만주문자의 3종언어로 금강경의 경문이 새겨졌고 상층부에는 수천에 이르는 작은 불상이 탑체를 돌아가며 들어서 있다. 이탑은 비교적 근세의 것에 해당하는 청조 옹정 연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소군묘를 참관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간이택시를 5위안 주고 버스정류장까지 이동하였다. 더위에 지쳐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뒤 저녁 5시쯤 다시 밖으로 나와 시내의 오탑사로 갔다. 원래 탑의 명칭은 금강좌사리보탑이나 탑의 기단부 위에 5기의 방형 사리탑이 놓여있어 오탑사라고도 부른다. 이탑은 비교적 축조연대가 늦은 것으로 청조 옹정시기 건축되었고 16m 높이의 유리벽돌을 쌓아올려 건축되었다.

탑신의 아랫부분에는 3가지 문자로 금강경 경문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에는 일천을 헤아리는 금속제 작은 불상이 아주 공들여 만들어졌다. 이탑은 탑의 기단부와 금강좌 탑의 정상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의 윗부분은 사리를 봉안한 영롱한 5좌의 소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좌의 남쪽은 拱門이고 문의 위에는 몽골어, 한어, 藏語로 쓰여진‘금강좌 사리보탑’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이 절 자체도 상당한 의미와 사적의 흔적을 갖고 있으나 오전에 들른 대소사와 시리투자오에 비해서는 중량감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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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수 2019-10-21 16:35:14
와하하- 왕소군의 묘가 저렇게 큰 지 몰랐네요.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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