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중퇴생인 이기붕 장남인 이강석의 '서울대 편입'과 관련해 장안이 시끌
무시험으로 들어갔지만 도중에 나와 육군보병학교로 옮겼다가 4·19혁명때 가족 비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듣기 평가시험에 지장을 줄까봐 항공기 착륙도 일시 정지할 정도로 온 나라가 집중한다고 해서 외신도 주목한 그 '거국적' 시험이다. 시험이라니, 과거시험에서 학종부까지 시험에 관한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룬 『시험국민의 탄생』(이강숙 지음, 푸른역사)에 실린 '낙하산 입학'이란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오른다.
1957년 3월 27일부터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육군사관학교 중퇴생인 이강석이란 학생의 서울대 법대 '편입'을 두고서였다. 이강석은 요즘 말로 '다이아몬드 수저'였다. 친부 이기붕은 서울시장과 국방장관을 거쳐 1954년부터 민의원 의장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이강석은 3월 26일 열린 이승만 대통령의 여든 두 번째 생일상에서 그의 양자가 되어 대통령에게 술잔을 올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강석의 서울대 편입쯤이야 그대로 넘어갈 법도 했건만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 학칙에 따르면 "이전 대학에서 1학년 이상 수료했거나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자"여야만 편입이 가능했는데 이강석은 1956년 육사 1학년을 중퇴했으니 아예 자격이 없었다. 게다가 "실력을 고사(考查)" 받아야 했는데 이를 거치지 않은 편입이라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육사 중퇴 직후에 있었던 편입 시도에 대학 측이 한 번도 없던 '특례'라며 1957년 초 입학시험을 치라고 요구하며 거절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대통령의 양자가 된 순간 편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법대생들은 4월 9일 학생총회를 열어 반대의견을 모으고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일부 교수도 이강석 편입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것이 '권력'이다. 4월 10일 최규남 문교부 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학생들이 오해한 것이라 했고, 문교부 차관은 "입학 권한은 총장의 자유재량에 속한 것으로, 학생들이 이를 침해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동맹휴학을 질타했다.
치안국장은 부정입학에 반대하던 교수와 학생들을 사실상 내사했고. 결국 4월 13일 다시 열린 법대 학생총회에서 교수들과 타협파 학생들이 주도해, 이강석은 "스페셜 케이스"로 입학시키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타협안이 통과되었다.
『경향신문』은 "우리 사회의 암으로 지적되어온 특권의식"이 "학원에서까지 발견된 사건"이라면서 "낙하산 입학"이라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판치는 '낙하산 인사'에 앞서 '낙하산 입학' 있었다 할까. 한편 학칙을 어기고 무시험 편입했던 이강석의 인생행로는 '꽃길'과 거리가 멀었다. 따가운 눈길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편입했던 그해 서울대를 그만두고 육군보병학교로 옮겼으며 4·19혁명 후에는 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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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