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회 대의원 안건으로 상정했으나 프로선수의 '아마추어 대회' 참여 불가 우세
정회장, 옛부터 씨름대회에서 이기면 황소와 쌀가마니 준 사례 들며 대의원 설득

83년 3월 16일, 씨름의 프로화를 내걸고 민속씨름이 발족했다. 그리고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4월 14일부터 17일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정주영 회장은 처음부터 장충체육관에 나와 직접 관전했다. 당시 무명이던 이만기가 혜성처럼 나타나 초대 천하장사를 차지했다. 이준희, 이봉걸 등 걸출한 선수들도 많아 가히 씨름 전성기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국체전이 문제가 됐다. 체육회는 '씨름 선수 중에 장사 씨름대회에 참가한 프로선수들은 아마추어들의 잔치인 전국 체전에 참가할 수 없다'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씨름인들이 정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씨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스포츠입니다. 주요 선수 대부분이 장사 씨름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선수들의 참가를 막는 것은 아예 씨름을 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국체전에서 씨름이 빠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정 회장이 현대그룹 신입사원들과 어울려 씨름을 했다는 건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정도로 씨름에 대해서는 애착이 있었다.
정 회장은 곧바로 체육회 대의원 회의 안건으로 이 문제를 상정했다. 대의원 대부분은 반대했다. 민속씨름은 우승자에게 상금을 주는 프로대회다. 여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모두 프로선수로 봐야 한다. 따라서 아마추어 선수들의 잔치인 전국체전에서는 빠지는 게 옳다는 논리였다. 논리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정 회장이 기가 막힌 비유를 했다. "나도 예전에 씨름해봐서 알아요. 옛날부터 씨름대회에서 이기면 황소도 주고, 쌀가마니도 주고 그랬어. 이봐. 무더기 똥만 똥인 줄 알아? 손가락 끝에 묻은 똥은 똥이 아냐?"
이 한마디에 대의원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정 회장은 이어서 "우리 민속스포츠인 씨름의 발전을 위해서 체전 종목에 넣어야 한다"라고 했다. 정식 투표에 들어갔고, 정 회장의 논리(?)에 설득된 대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뚝심도 대단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절묘한 비유로 상대를 제압하곤 했던 정 회장의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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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