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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⑬ 중국 두 차례 국공합작 '무위'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⑬ 중국 두 차례 국공합작 '무위'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7.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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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가 죽자 총통에 오른 쑨원, 북벌에 실패하면서 1924년의 제1차 국공합작 이뤄져
장제스는 일본과 한 패인 장쭤린(張作霖)타파해 베이징 함락시키며 마침내 군벌 타도 성공
일본 몰아내기위해 장쉐량이 시안(西安)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 이끌어내

제1차 세계대전 중 '세계 5대 열강'이 된 일본. 제국주이 시대였다.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을 꿈꿨다. 중국은 그런 일본을 '제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에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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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대공황은 일본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또 일본은 어떻게 그 위기에서 탈출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는 1920년대 일본이 연속적으로 겪었던 경제위기를,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1910~20년대에 펼쳐진 일본의 민주화 흐름, 즉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다뤄야 했다. 여기에 1920~30년대 구미 열강들과 일본의 관계도 빼 먹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복잡하고 광범위한 역사다.

그렇게도 길고 복잡한 역사를 설명했음에도 '공백'이 있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과 그에 따른 일본의 대응에 대한 얘기가 빠져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눈은 늘 중국 대륙을 향해 있었다. 보면 볼수록 먹음직스러웠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일본은 중국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바로 치고 들어갈 기세였다. 중국 근대사와 일본. 이들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간단하게라도 이를 정리해 보자.

➀모두가 알다시피 중국은 제1차(1840~42년) 및 제2차 아편전쟁(1856~60년)을 겪으며 그야말로 혼란의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➁반세기가 지난 1911년 중국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한 것이다. 이로써 다음해인 1912년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위안스카이의 황제 취임.
위안스카이의 황제 취임.

③일본 군부는 이 혼란을 활용하려 했다. 우선 조선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이를 통해 중국을 치려했다. 하지만 실패한다.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와 내각의 반대에 부닥쳤던 것이다. 이것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점이었다.

④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순탄치 않다. 혁명이 일어났다지만 청조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쑨원은 무엇보다 군사력 부재의 문제를 절감한다. 청조의 지시를 받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북양군(北洋軍)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황제 퇴진을 전제로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이후 황제는 퇴진한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본인이 독재자가 된 것이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자신의 제국을 건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⑤한편 일본은 1915년 영국 등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산둥성(山東省) 등 독일의 점령지를 빼앗는다. 당시 일본은 황제가 되려 했던 위안스카이의 속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일본은 위안스카이에게 독일 지배지의 조차권을 일본이 가져간다는 등 21개조를 요구한다. 위안스카이는 이 조항에 동의한다.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 끝없는 일본의 중국 개입 … 빈틈 보이면 공략

⑥1916년 1월 위안스카이는 결국 새 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이는 2개월 만인 3월 취소된다. 영국 등 열강들의 반발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3개월이 지난 1916년 6월 그는 지병인 요독증으로 사망한다.

⑦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상황은 또 다시 일변한다. 무엇보다 그가 창설한 중국 내 최대 실세 북양(北洋)군벌이 분열되고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⑧쑨원(孫文)이 이틈을 타 세력을 규합한다. 3년 동안 상당한 세(勢)를 확보한 그는 1919년 5ㆍ4운동을 계기로 중국국민당을 수립한다. 2년 뒤인 1921년 4월에는 중국 최대 군벌 북양군을 물리치고 다시 총통의 자리에 오른다.

⑨이 무렵(1921년 7월) 중국에도 공산당이 설립된다. 소련의 지시에 의해 중국 내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당이었다. 설립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⑩총통이 된 쑨원은 더욱 강력하게 북벌을 추진한다. 하지만 실패. 1923~24년 즈음에는 거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때 소련이 공산당과의 연합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친다. 이것이 1924년의 제1차 국공합작이다.

⑪하지만 국공합작은 오래 못 간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장제스(蔣介石)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것이다. 흐지부지하던 국공합작은 결국 1927년 2월 깨지고 만다.

⑫1928년 4월 장제스는, 1926년에 이어 두 번째 북벌에 나선다. 베이징에는 국민당을 배신하고 일본과 한 패가 된 장쭤린(張作霖)이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1928년 6월 장쭤린도 타파, 베이징을 함락시키며 마침내 군벌 타도에 성공한다.

⑬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군부는 중국에 이렇다 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한데다가 1925년 관료 출신 총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가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 등을 통과시키며 국내 사회 불안 요인을 잠재웠던 탓이다. 게다가 1927년 쇼와금융공황이 터지면서 군부는 군비 감축 등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히로시마와 원폭
히로시마와 원폭

⑭일본 군부로서는 뭔가를 해야 했다. 때마침 중국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장제스가 친일파 장쭤린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점령했던 것이다.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총리는 패퇴하는 그를 만주로 불러들였다. 그를 만주의 관리대리인으로 삼으려 했다.

⑮하지만 군부, 특히 관동군 생각은 달랐다. 만주에 대한 직접지배를 원했던 것. 결국 관동군은 1928년 6월 4일 펑톈(奉天) 인근에서 장쭤린을 살해한다(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

⑯장쭤린 사후 그의 군벌은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이어 나간다. 일본과의 친분도 그대로 유지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⑰1927년 쇼와금융공황에 이어 1929년 금해금(金解禁)과 미국의 대공황에 따른 쇼와공황(1930년)이 몰려왔다. 일본경제는 거의 붕괴 수준이었다. 출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 군부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다.

⑱그러나 구미 열강이 이를 제지하고 나선다. 국제연맹을 앞세워 일본의 만주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한 것.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는 적정선에서 열강과 타협하려 했다. 그러나 군부는 반대했다. 결국 1932년 5월 15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누카이 총리는 피격으로 숨진다(5ㆍ15 쿠데타). 뒤를 이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리는 국제연맹을 탈퇴, 군부의 손을 들어준다.

⑲하지만 만주사변 이후 장쉐량과 일본의 밀회는 끝난다. 장쉐량은 국민당에 지원을 요청한다. 장제스도 이에 응한다. 하지만 일본은 국민당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장쉐량은 공산당과도 밀약을 맺는다.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과 싸우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장쉐량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다. 1931년 12월 12일 자신의 본부 시안(西安)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해 버린 것이다(시안사건). 이로써 장쉐량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 낸다.

⑳만주사변 이후 중국과 일본은 소강상태에 빠진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협력에 미온적이었고 일본 내에서는 1932~36년 동안 사이토 마코토와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등 두 명의 총리가 중국 내 현상유지 정책을 폈던 것이다. 결국 군부는 주식 관련 스캔들 폭로와 쿠데타(2ㆍ26 쿠데타)로 이 둘 모두를 제거한다.

㉑1937년 6월 4일 두 명의 총리가 물러난 뒤 군부는 마침내 군에 우호적인 총리를 맞는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다. 그리고 한 달 뒤인 7월 7일 관동군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고노에 총리는 군을 급파한다. 이후 일본은 11월 상하이를 점령한데 이어 12월에는 난징(南京)을 진격하는 등 파죽지세로 공세를 펼친다. 1938년 이후 일본은 주요 중국 해안도시를 점령해 나간다.

㉒일본은 난징 점령 초입 무렵인 1937년 12월에서 1938년 2월 사이 '난징대학살'을 벌인다. 이때 난징 시민 20만~30만 명이 죽고 2만~8만 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다.

㉓일본 정부는 1940년부터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일본의 발아래 둔다는 '대동아공영권'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설파하기 시작한다. 또한 1940년 9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다. 그리고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조약(三國同盟條約)'을 체결한다.

㉔1941년 12월 8일 일본은 말레이반도에 진격하는 동시에 진주만을 공습한다. 이로써 중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비화한다.

㉕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놀란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공포하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이로써 마침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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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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