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5:15 (금)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⑧'히비야 방화 사건'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⑧'히비야 방화 사건'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5.02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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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상 대중이 정치운동을 통해 내각을 총사퇴시킨 특이 사례로 기록
러일 전쟁서 국민고혈 짜내 승리하고도 배상금 받지 못하자 국민불만 폭발
민심은 이미 전쟁에 '염증' …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본격적인 출발 신호탄

1911년 중국에 첫 공화정을 세운 신해혁명은, 엉뚱하게도, 일본 민주주의 발전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 일본 군부는 이 혁명을 중국 침탈의 호기로 삼는다. 하지만 일단(一團)의 민주주의 세력이 이를 막는다. 그리고 그들은, 총리는 물론 내각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을 만큼 서슬 시퍼런 군부 세력을 이겨낸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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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와 해석이 있다. 이럴 때는 사전을 보는 게 좋다.

가장 쉬운 사전이라는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을 보자. 사전은 민주주의를 가리켜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치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 형태"라 말한다. 이런 규정을 통해 우리는 대중 집회나 시위를 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사회악'보다 '국민의 정치참여'라는 시각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작을 1911~13년이라 했다. 일본 군부는 1911년 중국에서 터진 신해혁명의 혼란을 중국 침탈의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이를 반대하는 총리와 내각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중의원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와 국민이 그들을 저지시켰던 것이다. 오자키 의원은, 예나 지금이나, 확실히 민심을 대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05년 히비야방화사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하자 일본 시민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다.
1905년 히비야방화사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하자 일본 시민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다.

일본 근대화의 출범을 알린 메이지유신 이후 오랜 동안 일본은 천황과 지배엘리트들의 뜻으로 움직였다. 일반 시민의 투표로 구성되는 중의원(衆議院)이 있었지만 황족 및 화족(華族) 중심의 귀족원이 더 강력했다.

총리는 물론 내각의 각료도 대부분 그들의 차지였다. 수 백 년을 이어온 일본의 계급체제는 쉽사리 '민심'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국민도 불평과 불만을 참고만 있지 않았다. 1905년 도쿄 내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벌어진 이른바 '히비야방화사건(日比谷焼打事件)'은 민심 폭발의 기폭제가 된 좋은 사례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 당일 야당은 이를 반대하는 집회를 갖는다. 하지만 이 집회가 예상치 못한 폭동으로 전환되면서 수 십 명의 사망자와 수 백 명의 부상자가 나온다. 이후 도쿄 시내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고 만다.

다음날인 9월 6일.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정부는 급기야 계엄령까지 내려야 했다. 혼란이 극한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계엄령 선포 후 시위와 폭력은 진압됐고 도쿄(東京)는 다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베(神戸)나 요코하마(横浜)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도 조약 반대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자칫 폭력적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까지 있었다.

■ 최초의 정당 내각 출범

이는 단순한 시위와 진압 등 '사회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 1월 여당인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의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은 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총사퇴에까지 나섰던 것이다. 대중이 정치운동을 통해 내각을 총사퇴시킨다는 것은 일본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이 '히비야방화사건'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히비야방화사건은 러일전쟁에서 국민의 고혈을 짜내 승리하고도 배상금을 받지 못한 데에서 오는 일본 국민의 불만이 드러난 것이다. 이 민심이 1911년 신해혁명과 군부의 또 다른 침략전쟁을 막게 된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민심은 이미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제1차 호헌운동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1911년 시작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1925년 종료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 사이 일본은 정치적으로 어떤 일들을 경험했던 것일까? 다이쇼 시대의 민주화 흐름은 1925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끊어진 것일까? 제1차 호헌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으니 그 이후 사건들을 중심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아보자.

우선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서 천황은 세속 및 신성의 세계 모두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됐다. 그럼으로써 천황의 권능은 천황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1912년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이 관점에 반대한다. "일본은 법인 형식의 국가이며 천황은 국가의 한 기관에 불과하다"고 주장, 파란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이 '천황기관설'은 이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1918년 전국 단위로 펼쳐진 ‘쌀소동’. 러시아혁명과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벌어진 일이다.
1918년 전국 단위로 펼쳐진 '쌀소동'. 러시아혁명과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벌어진 일이다.

1917~18년 사이 벌어진 이른바 '쌀소동' 역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20세기 들어 일본은 전반적인 인구증가와 인구의 도시유입으로 만성적인 쌀 부족, 그리고 쌀값 인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터지고 일본이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전쟁을 치룰 것이라는 말이 돌면서 쌀값이 치솟았다. 그러다 1918년 8월 2일 정부가 실제로 러시아 파병을 선언하자 며칠 사이 쌀값이 두 배로 뛰었다. 견디지 못한 시민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전국적인 규모의 소동이 발생한다.

당시 총리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그는 민심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언론통제나 군 출동 등 강경 일변도로 나간다. 그러자 민심은 더욱 악화된다. 결국 데라우치 총리는 항복을 선언하며 내각이 총 사퇴하고 만다. 정권과 시민의 싸움에서 승리는 다시 한 번 시민의 것이 됐던 것이다. 민심 수습 차원에서 다이쇼 천황은 일본 역사 상 처음으로 평민 출신인 하라 다카시(原敬)를 총리로 임명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하라 총리와 그가 꾸린 내각은 일본 정치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당내각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라 내각은 육군, 해군, 외무대신 이외의 각료가 여당인 입헌정우회 소속이었다. 여기에 하라 총리는 현역 중의원 의원 출신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총리는 물론 각료 대부분이 귀족이나 화족(華族), 군부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확실한 차별화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하라 총리의 등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일본의 민주화를 자극했다. '평민재상'의 등장으로 노조와 학자, 지식인, 학생 등에서 보통선거권의 요구가 커졌던 것이다. 메이지헌법상에는 연간 15엔 이상의 납세자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1%에 불과한 수치였다. 20세기 들어 이 기준은 조금씩 낮춰졌다지만 그래봐야 1917년 기준으로 유권자는 2.6%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중은 평민재상의 출현에 자극을 받았고 급기야 보통선거권 요구를 위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이 폭발했던 날 일본에서는 5만 명 이상의 대중이 모여 보통선거권을 달라며 목청을 높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선거권은 납세자격 10엔에서 3엔으로 낮춰졌고 유권자 수는 146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

1923년 12월 27일 일명 '도라노몬(虎ノ門)사건'에서 시작된 '제2차 호헌운동'도 주목받을 만하다. 도라노몬사건이란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도라노몬에서 황태자 겸 천황 섭정이었던 히로히토(裕仁)가 저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로써 당시 총리였던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는 내각 총사퇴를 단행하고 그 뒤를 기요우라 게이고(清浦奎吾)가 잇는다.

하지만 내각은 야당과 국민이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기요우라 총리를 비롯해 대다수 각료가 귀족ㆍ화족 출신이었던 것. 야당은 다시 한 번 호헌운동을 전개했고 국민도 여기에 적극 참여한다. 결국 총선에서 호헌파가 승리하고 기요우라 내각은 사퇴한다. 이것이 1913년 제1차 호헌운동에 이은 제2차 호헌운동으로 이야기 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권리 회복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중요한 요소로 취급된다. 20세기 들어 '세계 5대 열강'에 꼽히는 일본이었지만 여성에게는 여전히 참정권이 없었다. 결국 20세기 들어 여성계가 본격적으로 이를 문제 삼았고 여성의 권리 전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19년 일본의 신여성이자 저널리스트,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히라츠카 라이쵸(平塚らいてう) 중심으로 '신부인협회'가, 1921년에는 여성운동가 건틀릿 츠네코(ガントレット恒) 중심으로 '일본여성참정권협회' 등이 만들어진 데에는 모두 이 같은 배경이 잇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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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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