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파워 호주! 고민과 선택] ④ '캔버라 의사당'에서 본 노동당 정치의 실험
영국식 의원내각책임제( 양원제 )와 미국식 연방제도가 혼합된 정치 체제 구축 지난 5월 실시된 총선서 노동당,과반의석( 77석 ) 얻어 105개월 만에 정권 탈환 대중국 강경 노선 유지 … 새 총리 "공화제 전환 관련 국민투표 임기 내 않겠다" 최악의 산불참사 상기하며 기후 위기 극복 공약…원주민 지원 헌법 기관 추진
【캔버라=성태원 편집위원 겸 순회특파원】 지난달 27일(화) 호주 수도 캔버라에 있는 의회의사당(Parliament House)을 찾았다. 경제 선진국이자 외교·군사 강국인 호주의 정치 제도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갔다.
흐리고 가끔 비도 내릴 것이라는 예보에 따라 배낭 속에 우산을 챙겨 넣고 도보로 찾아갔다. 시내 숙소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니 의사당 방면으로 곧게 뻗은 다리와 다리 양쪽의 호수(벌리 그리핀 인공호수), 그리고 저 멀리 의사당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풍경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조용하고 편안한 전원도시 같은 캔버라에 의사당 주변 풍경이 자연스레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2,600만 호주인들의 정치적 의사가 민주적으로 결집 되고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자 주변을 좀 더 살펴보게 됐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계획도시로 알려진 캔버라 인공호수 주변에 호주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총본산인 의회의사당을 배치한 것이다.
호주를 '선진 민주 강국'으로 치면 이 공간에서 정치·외교적으로 강한 힘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양쪽의 호수를 번갈아 보며, 정면으론 의사당 국기 게양대를 바라보며 약 30분 걸으니 의사당에 도착했다.
흰색의 단아한 사각 구조의 의사당은 초대형 건물은 아니었다. 삼각형의 지지대 위로 높이 솟아있는 국기 게양대 꼭대기에서 호주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평일(화) 오전 11시쯤 도착했는데 의사당 안팎에서 방문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가족처럼 보이는 방문객들은 호주인들로 여겨졌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 끝에 간단한 보안 점검 절차를 거쳐 입장할 수 있었다.
내부 역시 위압적이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구조였다. 1층 안쪽에는 'Great Hall'이라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호주 여성과 원주민들의 참정권 확대 역사를 다룬 전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또 전직 호주 총리 및 의회 지도자 등의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가 벽 곳곳에 걸려 있었다.
특히 지난 9월 8일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젊을 때 초상이 잘 보이는 위치에 걸려 있었고 바로 옆에 추모의 뜻을 담은 안내문도 서 있었다. 2층 한 편에선 'Queens cafe'란 식당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카페 앞 널찍한 공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동상도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9월 10일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가 이곳 여왕 동상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헌화하는 장면이 실린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2층 왼쪽 안내 표시를 따라가니 의사당의 중심인 대회의장이 눈 아래에 펼쳐졌다. 의사일정이 없는 시간이라 방문객들만 삼삼오오 높은 위치의 의자에 앉아 회의장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곳 역시 그렇게 위압적이거나 거창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호주 국민이 뽑은 227명의 상·하원 의원들(상원 76석, 하원 151석)이 호주 권력자(수상)를 배출하고, 행정부를 구성하고, 국정을 감시하며, 외교와 국방과 경제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금을 매기며,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 각종 법안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아래 보이는 의석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호주는 영국식 의회주권에 입각한 내각책임제(양원제)와 미국식 연방제도가 혼합된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영 연방으로 영국 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해 형식상 영국 왕이 국가 원수가 된다.
하지만 호주의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6개 주 연방정부 시스템하에 운영되는 상·하 양원에서 나온다. 상원과 하원, 연방정부와 주 정부, 행정부와 의회 등이 서로 권한과 의무를 균점하면서 민의를 수렴하는 구조다.
지난 5월 21일 진행된 제47회 호주 총선에서 노동당이 151석 중 77석으로 과반의석을 얻어 8년 9개월 만에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직전 여당으로 치열하게 경쟁했던 우파 자유·국민 연합이 패배해 좌파 노동당 출신의 앤서니 앨버니즈 현 총리를 탄생시킨 바 있다. 한 교민으로부터 집권 초반의 앨버니즈가 지금까진 비교적 높은 지지도를 얻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호주에 와서 알았지만 선거 때 투표에 불참하면 50~70 호주달러(약 4만7000원~6만5000원) 상당의 벌금을 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투표율이 90% 이상인 경우가 많다. 국민이 나라에 무엇을 요구하듯 나라도 국민이 참정권을 의무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일종의 장치로 여겨졌다.
중도 좌파로 알려진 앨버니즈는 이탈리아계로 호주 최초의 비(非) 앵글로-켈틱계 총리로 꼽히는데 공공주택에서 장애연금을 받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이력으로 눈길을 끈 정치인이다. 다문화 국가인 호주의 새로운 영웅으로 부각된 그는 "호주를 하나로 모으겠다", "(2019년 말 호주 역사상 최악의 산불 참사를 상기시키며)기후 전쟁을 끝내겠다"는 등의 공약을 앞세워 승리했다.
그의 등장으로 지난 몇 년간 중국에 강경 일변도 정책을 펼쳐온 호주 외교 노선이 달라질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집권 5개월째인 앨버니즈도 여전히 대(對) 중국 강경 외교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호주는 미국의 반중 성향 협의체인 기밀정보 공유 동맹 '파이브 아이즈'는 물론 안보 동맹인 '쿼드'와 '오커스'까지 가입하고 있다.
앨버니즈는 지난 7월 30일 자신의 임기(2025년) 내에 호주 원주민(애버리지니=Aborigine)을 지원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헌법 기관으로 설치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혀 주목받았다.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로 불거진 군주제의 공화제 전환에도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평소 공화제 전환을 주장해왔던 그가 보수표를 의식한 듯 관련 국민투표를 자신의 임기 내엔 실시하지 않을 방침임을 밝히기도 했다.
1988년 준공된 현재의 의회의사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1927~1988년 사이 의사당으로 사용됐던 호주 옛 의회의사당이 있는데 현재는 박물관 등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앞 잔디광장에서 원주민(애버리지니) 관련 단체가 텐트를 치고 빼앗긴 권리를 돌려 달라는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건 채 시위를 벌이는 광경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