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60년사] (12)1960년 농어업의 GDP 비중은 37%
종합농협 출범 무렵 농업의 역할 막중했지만 외국의 식량 원조 받을 만큼 생산성 낮아 비료 • 농약 등 영농자재 공급에 주력…상호금융 통해 농업인에게 투자재원 지원 힘써
종합농협이 출범한 1961년 전후는 극심한 빈곤과 기아, 정치적 • 사회적 불안정을 그 특징으로 한다. 40년 가까운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 남북분단과 전쟁이 남긴 것은 절대빈곤이있다. 경제성장과 함께 안정된 사회구조를 이루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다고 할 것이다.
1960년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는 취업자의 60% 이상, 그리고 GDP의 37%를 농어업부문이 차지하고 있는 전통적 농업사회였다. 농업의 비중은 높았지만, 외국으로부터 식량원조를 받아야 할 만큼 농업생산성은 낮았고, 생산에 투자할 자원은 부족했다. 빈곤의 지속에 따라 농지개혁으로 창출된 자작농체제도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도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회발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높았고, 그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정책으로 이어졌다. 종합농협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으며, 그 결과 특유의 발전 경로를 겪어왔다.
고도성장기 농업부문의 제1 과제는 농업생산력 증대를 통한 식량문제 해결이었다. 농협은 이를 위해 비료 • 농약 등 영농자재의 공급에 주력했다.
농협의 비료공급량은 1970~1980년 47.1% 증가했다. 또한 1969년 도입된 상호금융을 통해 농업인에게 투자재원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농가의 사채의존도는 1971년 60%에서 1990년 13.9%로 감소했다. 농업인이 종자 • 비료 • 농약을 구입해 농산물을 생산, 판매하기까지 원활한 자금공급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우리나라는 1976년 최초로 쌀자금을 달성했고, 쌀의 안정적 공급체계 구축에 성공했다.
1970년대부터 시장출하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적 농업이 확산되면서 관련된 농협의 구 • 판매사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국민의 다양화된 식생활 욕구를 배경으로 1980년대에는 품목농협과 축협의 성장이 가속화됐다. 농협은 산지조직화, 농축산물 공판장 증설 등으로 도매 유통사업을 확장해 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국가적 위기였다. 기업과 은행이 줄줄이 도산해 외국계 기업으로 헐값에 팔려나가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불안해진 국민들은 안전한 민족은행인 농협을 찾았다. 종합농협으로서의 강점이 다시 한 번 더 발휘된 시기였다. 농협은 국민들에게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거기에서 창출된 수익으로 경제사업과 교육지원사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1990년대 시장개방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은 지속됐으나 국내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농업 • 농촌은 소외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의 소득수준이 도시가계와 비슷했지만, 지금은 60%에 불과할 정도로 소득격차가 확대됐다. 농업과 농촌 사회의 위기가 현실화됐다. 2000년대 이후 농협은 농업과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사업 역량을 강화해왔다. 인력지원 • 농기계은행 등 농업인 지원 사업을 확대하고, 농업인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강화했다. 또 지자체협력사업 • 농촌관광 등을 통해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수입농축산물이 급증함에 따른 반대급부로 식탁의 안정성은 떨어졌다. 광우병 파동으로 수입쇠고기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고, 멜라민 분유 파동, 잔류 농약, GMO 등으로 먹거리에 대한 불안이 가중됐다.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는 국제 물류 중단과 자국 이기주의 확산으로 식량안보에 대한 우려를 가중시켰다. 농협은 〈안심한우〉,〈안심한돈〉 등 건강하고 안전한 국산 먹거리 공급을 위해 주력했다. 코로나19 위기를 맞아서는 농산물 꾸러미 공급, 공적마스크 판매 등으로 국가적 위기극복을 지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