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03) 포스코(포철)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 준공식 연설서 '쓰루의 기공식 참석' 언급하며 감개무량해 생산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 흑자내고 1980년의 생산량 1200만톤으로 국제사회 조롱의 '대반전'을 이뤄내 … '중화학 공업의 입국' 도약 밑거름 경부고속도로,새마을운동과 함께 '하면 된다'(Can Do Spirit)정신의 표상

2022-11-15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쓰루는 자기가 출범시킨 4대 핵공장이 한국의 중공업화를 선도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4대 핵공장 건설이나 그에 대한 일본의 자본 협력의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1972년 기준으로 4대 핵공장 중 (1971년 1월에 착공한) 신동공장 건설사업은 53%, (1971년 11월에 착공한) 조선소 건설사업은 60%의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1973년 경제백서』) 주물선 공장은 1972년 12월에 착공되었다.

기획원이 4대 핵공장 건설사업 추진을 청와대에 넘기고 난 1년 2개월 뒤, 1973년 1월 박통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영원히 뒤바꿔놓을 중공업화를 선언했다.

1969년

4대 핵공장 건설사업이 중화학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심대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4대 핵공장 건설사업은 중화학공업 전사(前史)로서 중요한 실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기획단도 "4대 핵공장 건설계획은 그 후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해나가는 데 모체가 되었다"고 그 공헌을 인정하고 있다.

1973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조강 103만 톤의 1기 설비를 갖춘 포항종합제철이 완공됐다. 쓰루가 박통, 박태준 씨와 함께 기공 발파의 버튼을 누른 지 3년 3개월 만이었다. 박 대통령의 오랜 집념, 김학렬의 기획력과 추진력, 박태준의 현장 열정이 뜨겁게 융합된 결과였다.

"회사로 비유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은 원대한 비전과 불굴의 리더십을 발휘한 CEO 겸 회장, 김학렬 부총리는 뛰어난 기획력과 과감한 추진력을 보인 기획 담당 사장, 박태준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불꽃같은 정열과 사명감으로 작업을 지휘한 건설 담당 사장의 역할을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완공식 단상에는 박통과 박태준 씨가 감격에 찬 얼굴로 앉아 있었다. '포철 드라마'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 기념식에는 '포철 3인' 중 1년 4개월 전 유명을 달리한 쓰루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그의 부인이 참석하고 있었다.

박통의 축하연설은 "지금부터 3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나와 김학렬 부총리, 그리고 박태준 씨가 발파 기공식을 했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오늘 염원하던 사업이 이뤄져서 감개무량하다"가 첫마디였다. 김 여사는 준공식 내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포철 건설에는 전후 최대 역사(役事)라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3배에 해당하는 1215억 원이 투입되었다. 포철은 생산 개시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1980년도의 철강 생산량은 1200만 톤으로 크게 늘어났다. '한국의 제철사업은 경제성이 없다'고 단언했던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와 국제철강 커뮤니티의 조롱 섞인 우려에 대한 대(大)반전이었다.

포철로 시작된 한국 경제의 중공업화는 4대 핵공장과 더불어 1973년부터 본격적인 중공업 입국을 이끌어냈다. 포철이 선진 공업국으로서 한국의 도약에 첫걸음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포철의 역사적 의의는 더 중요한 다른 지점에서 설정될 수 있다. 포철이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시작된 계기이자 출발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포철이 없었다면 박정희 정권 시기 경제개발을 상징하는 중화학공업화는 의미 있는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거나 훨씬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정태헌·배석만, 「박태준과 포항제철을 통해 본 경제개발시대 정치경제학의 양면성」,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2013~2014)

포철은 경부고속도로,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한국인의 'Can Do Spirit'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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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렬 부총리 일대기의 필자 김정수■ 1950년 김 부총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김 부총리가 교편을 잡고 있다가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한 고등고시 시험을 치른 직후였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 해에 6.25전쟁이 터져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피난 갔다.

어린 시절을 거기서 보내다가 아버지가 서울서 관료생활을 하게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혜화초등학교, 경기중,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줄곧 경제 공부를 이어갔다. 미국 존스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원, 독일 킬(Kiel) 세계경제연구소, 산업연구원(KIET),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경제연구원, 미국 브루킹스(Brookings) 연구소 등에서 경제학을 연구했다.

1991년부터 두 해 동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관을 지냈고, 1994년부터 18년 동안 중앙일보에서 경제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수년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한국경제정책사를 강의하면서 오늘의 우리 경제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궈졌는지 관심을 갖게 됐다.

중앙일보에서 경제 전문 대기자로 활동할 당시 최우석 전 중앙일보 주필(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역임 ·2019년 작고)의 권유로 '아버지, 김학렬 부총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로 2020년 2월 '내 아버지의 꿈'(덴스토리刊)이란 책을 펴냈다. 이코노텔링이 연재하는 '내 아버지 김학렬의 꿈과 시련' 은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 아래 그 책의 주요 장면을 발췌한 후 저자의 감수와 가필로 편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