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 육성의 설계자'오원철 전 경제수석 별세

한국경제 성장사의 증인 …울산 유화단지, 방위산업, 원자 핵연료와 국토개발 등 곳곳에 밑그림 박정희 대통령의 '압축성장' 불가피성 강조…박 대통령은 '나라의 보물'이라며 '吳國寶'로 불러

2019-05-30     양재찬 이코노텔링 편집고문 (언론학 박사 · 경제저널리즘)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 7시 별세했다. 향년 91세.오원철 제2경제수석비서관은 엔지니어 출신 테크노크라트의 효시로 박정희 전 대통령 옆에서 9년간 경제수석으로 정책보좌를 했다. 오 수석을 빼 놓고는 한국의 산업화를 말할 수 없다. 그는 1960∼1970년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하며 한국경제 개발을 이끈 주역이다. 18년의 공직생활 중 그가 맡았던 직책은 경공업에서 시작해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중화학공업 기획단 단장을 맡아 창원을 비롯해 울산, 온산, 구미, 여수 등 전국 6개 산업기지 조성을 지휘했다. 이를 계기로 창원시 1호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이라는 비밀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일쇼크' 때에는 중동 진출을 기획했다. 행정수도 이전도 맡아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끝났다. 업무수행 능력이 탁월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공단 시찰을 마친 뒤 ‘나라의 보물’이라며 ‘오국보(國寶)’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 수석은 황해도 송화군 출신으로 경성공전(서울공대 전신) 화공과를 졸업하고 공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시발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을 지내다가 1961년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으로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 해에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시작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화학 분야)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실무 책임자 역할을 했다.

1964년 공업 제1국장이 돼 우리나라 내수 산업 체제를 '수출공업 구조'로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를 입안 추진했다.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때에도 대통령 특명에 따라 당시 주력사업인 석유화학공업을 계속 담당했다.

1973년

상공부 차관보 시절에는 국가 기간산업인 광업·공업·전기 전반에 관한 국가 산업정책을 이끌었으며 포항제철 전원 개발사업에도 참여했다. 1971년에는 청와대 제2경제수석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8년간 자리를 지켰다. 이때 대통령 특별지시로 중화학공업 기획단장을 겸직하며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그리고 율곡계획, 행정수도 이전계획 및 2000년대 국토계획, 기술인력 양성 및 각종 연구소 설립 계획, 중동 진출 방안 등을 입안하고 추진했다. 그를 빼놓고 '박정희식 압축성장' 방식인 '한국형 경제개발 모형'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 때 권력형 축재 혐의로 체포되며 공직에서 물러났다. 12년간 대외활동을 못하다가 1990년대 들어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고문 등을 지냈다.그는 이후 7권짜리 대작인 '한국형 경제건설'과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등의 책을 펴내고 박정희 일대기를 정리했다.

2009년에는 박정희 서거 30주기를 맞아 영문 자서전 '더 코리아 스토리'를 출간했다.여기서 그는 경제대국 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유신 체제를 옹호했다. 또 10․26 사태에 대해선 부마사태 해결 방법을 두고 대립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재하던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빈소는 서울 성모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6월 1일 오전 7시30분이다. 장지는 경기도 가평군 선영으로 정해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오범규 명지대 교수와 딸 오인경 전 포스코 상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