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5) 대공황과 히틀러 '위대한 독재자' ⑨ 히틀러의 국가통제論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에 시달리고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파괴 걱정해 히틀러의 '세계 제국의 꿈' 비현실적이었으나 5년 만에 모든 것 이뤄내
케인스와 히틀러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케인스는 히틀러에 관심이 없었고 히틀러가 케인스에 대해 언급했다는 기록도 없다. 게다가 히틀러와 케인스의 공통된 주장은, 시점으로 봤을 때, 히틀러가 앞서거나 거의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케인스가 내 생각을 훔쳐갔다"고 말해도 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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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경제 그 자체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한 확고부동한 철학이 하나 있었다. 경제는 국가에 종속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믿지 않았다. 너무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렸고 과도한 무역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거기에 생산에 대한 통제의 부재로 늘 과잉생산에 시달린다고 봤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의 경제관이 마르크스주의와 혼동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가 주창하는 용어도 '국가사회주의' 아닌가. 하지만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 둘 사이에는 아주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상극이랄 수 있겠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 노동자의 계급투쟁과 혁명을 강조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아니었다. 그는 극우보수의 대표자였다. 그에게 노동자의 계급투쟁과 혁명은 눈곱만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2000년 전 만들어진 게르만 민족주의
그가 중시했던 것은 '계급'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독일'이라는 '국가' 그리고 '게르만'이라는 '민족'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기 때문 아니냐고? 아니다. 히틀러가 갖고 있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그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그 기원은 무려 20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라는 책이 그 효시다.
당시 로마는 세계 최강이었다. 주변 지역을 지배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단 한 곳 계속해 원정에 실패했으니 그게 바로 게르만 거주 지역이다. 타키투스는 이 사실에 자극받아 게르만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강점을 찾아냈다. 자연인이었던 게르만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임전무퇴의 강인함이 있었다. 일부일처제와 혼전순결을 중시하는 도덕성도 강했다. 이에 타키투스는 타락한 도시 생활에 찌든 로마인들을 비판하며 "게르만을 본받으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18~19세기는 유럽 민족주의의 발흥기였다. 이때 독일인에게 이 책은 '민족적 성서'였다. 독일 엘리트는 이 책을 근거로 '독일민족이 세계 최고'라며 자부심을 일깨웠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독일은 소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게르만이 1834년 관세동맹에 이어 1871년 통일까지 이룬 데에는 이 같은 민족주의가 있었다. 이런 시각에서라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민족주의 형성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독일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이처럼 오래 됐다. 히틀러는 거기에 빠진 대다수 독일인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가 보기에 한 나라의 모든 것은 국가와 민족에 '종속'돼야 했다. 경제는 물론 노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좀 더 나갔다. 그는 위대한 민족은 열등한 민족을 약탈하고 지배할 수 있다 믿었다. 그것이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 역시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원리를 따랐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히틀러 사상의 핵심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다. 앞서 말한 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 해결 방식을 노동자의 계급투쟁과 혁명에서 찾았다. 반면 히틀러에게 그 방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경제ㆍ노동자의 종속, 그리고 그를 통한 이웃 나라ㆍ민족의 지배와 약탈이 그 해결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히틀러에게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궁극의 '꿈'은 당연한 것이었다. 유럽 다른 나라들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1933년 그가 총리의 자리에 오르자 주변 나라들은 우려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뻔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잔재 척결과 라인란트 비무장의 종료, 그리고 1914년 이전으로의 국경선의 회복 등이었다. 하지만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 희망을 이루려면 히틀러는 유럽 열강들과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주변국들은 히틀러가 거기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히틀러 역시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다른 나라를 압도할 무기가 필요했고, 자신에게 목숨 바치는 군대가 필요했고, 또 독일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돈'이었다. 무기도 돈, 군대도 돈.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실업 타파, 일자리 창출에도 돈이 필요했다. 그에게 경제의 재건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돈이 없었다. 패전 이후 엉망진창이 된 경제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까지 겪었다. 인플레가 두려워 새로 돈을 찍기도 어려웠다. 이웃 나라에 대한 약탈도 불가능했다. 군비(軍備)도 부족했지만 주변 강대국의 서슬 퍼런 시선도 문제였다. 이런 와중에 대공황까지 터졌다. 독일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보다 나락으로 빠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유럽이나 독일 내 유력 인사들이 히틀러의 '꿈'을 비현실적으로 본 것도 당연했다. 도대체 돈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히틀러는 이 모든 문제를 극복했다. 5~6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군대에 무기에 심지어 민심까지. 모든 게 '돈'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는 결국 이 '돈'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어떻게? 히틀러의 자금 동원 능력.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은 '돈' 그 자체가 갖는 비밀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당대 독일 금융계를 쥐락펴락한 한 인물에 집중하려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케인스를 능가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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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