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88) 제동 걸린 '쓰루의 독주'
포철완공 등 국가 경제과제 조속 마무리하려 박대통령의 신임 십분 활용 행정 부처 ㆍ정계는 물론 언론까지 그의 권위 인정했지만 먹구름 엄습해 1971년 대선의 해에 물가 급등하자' 언론의 실망 '에 뜻밖 병마까지 겹쳐
1971년은 선거의 해였다. 4월 대선과 5월 총선을 앞두고 김학렬은 전국을 돌며 박 정권의 경제적 성과와 향후 경제 발전 홍보에 열을 올렸다. '정치인 쓰루'에 언론은 실망을 표했다
생활물가마저 손 밖에서 놀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초조해져갔다. 그해 11월, 그의 사저 2층 서재에 도둑이 든다.
그 사건은 부총리로서 쓰루의 권위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고, 결국 그는 병마로 쓰러지고 만다. 1972년 3월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추
진해온 성과물들은 속속 완성되었다. 4개월 뒤 홍릉에 KDI가 개관했고, 이듬해 7월에는 포항종합제철이 완공되었다. 특히 그가 기획원 조직 안에 남긴 '변혁의 DNA'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 경제에 살아 있다.
쓰루가 부총리 권위에 집착한 것은 와신상담 끝에 쥐게 된 권력에 취하거나 그 갑질을 즐겨서는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국가과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정책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내고자 하는 조급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동료, 부하 등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자주 상궤를 벗어나는 그의 언행을 마냥 참거나 이해해준 것은 아니었다.
박통이라는 최고 권력의 신임은 쓰루에게 경제정책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안겨주었다. 행정부처와 업계는 물론이고, 정계, 심지어 언론계까지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2년 넘게 박통의 신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다스의 손' 쓰루가 착착 꺼내 보이는 경제(정책)적 성과 덕분이었다. 달리 말하면, 박통의 신임은 부총리로서의 능력을 보이는 동안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행여나 부총리로서 직무 수행 능력에 의심이 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대통령의 문고리 권력은 하루아침에 무산될 수 있는 극히 섬약(纖弱)한 유리잔과 같은 것이었다. 1971년 선거철부터 그런 현상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