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150년 전 日이와쿠라 사절단의 야망
1871년 메이지 정부의 선진국 따라잡기에 '7세 여아' 유학생도 포함 기관차 공장, 조선소 등 산업혁명 현장은 물론 감옥까지 찾아가 열공 정부 수뇌급 절반 미국 등 서구 시찰…"40년 밖에 안 뒤져" 추격 다짐
요즘엔 이래저래 일본발 소식이 많이 들린다. 올림픽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이 이기면 기뻐서, 지면 안타까워서 눈과 귀가 도쿄로 향한다. 그러니 가깝고도 멀다고 하는, 애증이 교차하는 나라 일본 이야기를 하련다.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 부두가 시끌벅적했다. 전권대사 이와쿠라 토모미 일행 48명과, 귀족·사무라이 집안 출신 유학생 59명이 미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 행차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럿이다.
부전권대사로 재무대신 오오쿠보 토시미치(41세), 공부대보 이토 히로부미(30세) 등 훗날 일본제국의 기둥이 되는 정부 요인이 포함된 사절단의 규모다.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혁한 폐번치현을 단행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정부 수뇌의 절반이 해외 순방에 나선 것이니 시기와 규모 모두 간단하지 않다. 명분은 그간 막부 정권이 구미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갱신이었지만, 근대 국가 건설에 막 첫걸음을 뗀 메이지 정부로선 "용감하다면 용감하고 경솔하다면 경솔한" 조치였다.
유학생들은 또 어땠는지. 일행 중에는 단발머리의 여자 유학생 5명이 있었는데 최연소는 만 7세의 츠다 우메코였다니 이 순방이 단순한 외유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정부의 절반이 자리를 비운 이 일행의 여정은 당초 10개월 예정이었지만 서구 문명을 보고 배울 게 많았는지 1년 이상 길어져 1873년 9월에야 귀국했다. 이들의 서구 순방이 수박 겉핥기에만 그친 게 아니다. 귀국 후 일본에 적용할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어느 나라에 가든 숨 쉴 틈 없이, 악착같이 배우려 들었다. 상공회의소, 기관차 공장, 조선소, 전신국 같은 산업혁명의 현장은 물론 농아학교, 박물관에 심지어 감옥과 비스킷 회사까지 찾아다니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란 의욕에 불탔다.
더 놀라운 게 있다. 이와쿠라 대사를 수행한 기록계 비서관이 『특명전권대사 구미회람실기』란 5권짜리 보고서를 써낸 것이다. 거기 보면 과학적인 합리 추구의 정신, 기업가 정신, 노동자와 자본가의 심각한 대립,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 구미 열강의 장단점이 샅샅이 수록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구미가 오늘의 부를 이룬 것은 1800년 이후의 일로 뚜렷한 발전을 보인 것은 겨우 40년에 불과하다"며 서구의 기술문명을 따라잡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는 『명치유신과 일본인』(하가 토우루 지음, 도서출판 예하) 중 일부인데 이후의 역사는 방향은 그릇되었을지언정 이들의 자신감이 터무니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찌감치 국력을 기울여 서구 따라잡기에 나섰던 이와쿠라 일행의 행적을 보면 적개심이야 충분한 이유가 있지만 지금도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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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