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나라를 쓰러뜨린 리더십
송나라 휘종은 예술가 기질은 있었으나 권력 의지나 통치술 '낙제점' 향태후 눈에 들어 황제 등극…'굴욕적인 화친'외교 일관해 망국 자초 휘종의 황제 자질에 '오리더러 나무에 오르라는 격' 이라는 조롱 들어
중국 역사에 조길(趙佶)이란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들어본 이는 거의 없을 터다. 실은 송나라 휘종(1082~1135)의 이름이니 말이다. 송 휘종은 누군가. 중국 한족이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게 여기는 '정강(靖康)의 변'의 주인공이다. 즉, 금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아들 흠종과 함께 적국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포로로 지냈던 북송의 어리버리한 황제다.
한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휘종은 폭군도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는 화가, 서예가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예술가였다. 권력을 잡을 뜻도, 자격도 없던 그가 황위에 오르면서 나라를 말아먹고,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시대의 비극이라 할 만했다.
북송 8대 황제 휘종은 6대 신종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신종의 뒤를 이은 배다른 형 철종(조후)이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후에도 조길이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없었다. 장유유서란 서열을 따져도 그보다 나이 든 형들이 여럿 있었고, 적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황위에 올랐다. 신종의 아내이자 조길의 계모였던 향태후(向太后)가 그를 낙점한 덕분이었다.
황제의 후계자는 전임 황제, 후궁의 주도권을 잡은 태후나 태감, 권신들 간의 미묘한 권력관계에서 정해지는데 이때는 철종이 비명횡사했으므로 태후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게 작용했다. 그렇지만 신종 사후 매일 향태후의 처소에 들러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분에 조길은 그야말로 거저 주운 것이나 다름없이 황위에 올랐다. 나이 열여덟에.
문제는 조길이 예술가로선 재능이 있었지만 권력의지도, 통치술도 떨어지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도교에 빠져 흥청망청한 데다가 간신과 무능한 신하가 넘쳐나 요나라와 금나라의 위협을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었다. 수많은 황금을 바치고 적국을 '백부의 나라'로 부르는 등 굴욕적 화친을 맺으면서까지 그랬다.
중국의 2천 년 역사에서 '인재 말살 유희'를 살핀 『역도태』(청완쥔 지음, 미래의 창)에선 이 사례를 두고 "오리더러 나무에 오르라 한 것과 마찬가지"라 했다. '오리가 나무에 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조길이 황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송나라의 망국이 앞당겨졌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예술가로서 그의 삶은, 중국 문화는 더욱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내년 대선을 앞두고 '꿩' '매' 등 다양한 수사가 동원되기에 문득 떠올려본 '오리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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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