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드라마 대통령'진짜 당선 기염

코미디언 출신 41살 젠렌스키, 70% 득표율로 압승

2019-04-23     이기수 이코노텔링기자
드라마속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드라마 속 대통령이 실제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선거 개표가 99.68% 진행된 22일(키예프 현지시간) 오후 현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73.21%를 득표했다고 공표했다. 이에 맞선 페트로 포로셴코(53) 현 대통령은 24.46%를 얻는 데 그쳤다. 투표율은 62.07%를 기록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패배를 시인했다. 젤렌스키 당선자는 5월말 대통령에 취임한다.

젤렌스키는 소비에트연방 시절인 1978년 우크라이나 중부 지방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제연구소 교수, 어머니는 공학자였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젤렌스키는 키예프 국립 경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어려서부터 예능 쪽 재능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17세 때 러시아 TV 코미디쇼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뒤 ‘러브 인 더 빅 시티’ 등 TV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거나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그를 ‘국민 배우’로 만든 작품은 우크라이나에서 2015년부터 방송 중인 정치 풍자 드라마 ‘국민의 종’이다. 여기서 젤렌스키는 부패한 정권을 비판하는 영상으로 SNS 스타가 된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고교 교사 역할을 맡았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부패한 정치인을 척결하고 재벌을 개혁하는 활약상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2013년부터 친서방 운동인 ‘유로마이단(Euromaidan) 운동’을 지지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힌 젤렌스키는 2017년 드라마 제목과 이름이 같은 당 ‘국민의 종’을 창당한 뒤 대선에 도전했다.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처럼 부패와 빈곤 척결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포로셴코와 젤렌스키 모두 친서방주의자이지만 대(對)러시아 정책에선 젤렌스키가 상대적으로 온건하다. 젤렌스키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특히 정치 신인임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그의 대선 승리를 기성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아웃사이더 정치 신인에게 절호의 기회가 된 것으로 진단한다. 뉴욕타임스(NYT)는 “(현 대통령은) 러시아와 5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유권자들은 그보다 부패·빈곤 등 국내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14년 우크라이나에 친서방·친유럽연합(EU) 정권이 들어서며 변화에 대한 갈망이 크게 일었으나 포로셴코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권 교체 후 5년이 지났지만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유럽 대륙의 최빈국 중 하나다. 한때 형제국가였던 러시아와 크림 사태 등으로 갈등을 빚으며 정치권은 친러냐, 친서방이냐를 두고 갈려 있다. 1만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정부군과 친러 반군 간 교전은 5년째 계속되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은 안갯속이다.

젤렌스키는 돈바스 지역의 무력분쟁을 종식하겠다고 공약했다. 대통령이 되면 반군을 지원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담판을 벌이겠다고도 했다. 출구 조사 발표 뒤 젤렌스키는 “실망시키지 않겠다. 우크라이나인으로서 모든 옛 소련 국가를 향해 ‘우리를 보라.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탄탄한 지지 기반 없이 불어닥친 ‘젤렌스키 돌풍’에 서방 언론은 우려의 시선도 보낸다. “젤렌스키에게는 강력한 정치적 견해나 공약이 없었다”(BBC), “새 대통령의 경제 공약은 불확실하며 금융계의 걱정은 여전하다”(로이터) 등이다. 젤렌스키의 재벌 후원자인 콜로모이스키와의 긴밀한 관계를 우려하는 여론도 있다. 그가 재벌의 영향력을 극복하고 푸틴에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BBC는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