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76)현금차관 '금지령'

'재무부 독립' 2탄 성격 … 달러 들여와 원화로 바꿔 ' 운영자금 ' 활용 부작용 꼽아 원화발행 늘자 통화관리 비상 … 존슨 대통령 방한 때 美도 통화량 상한유지 요청 국감서 통화량 도마에 … '정치여건 성숙' 판단해 내자용 현금차관 전면금지 선언

2021-11-02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김학렬

역금리 시정을 선언하고 1주일 뒤인 10월 20일, 쓰루는 기자들 앞에서 "현금차관, 특히 내자를 동원하기 위한 목적의 현금차관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을 했다. 즉, '공장을 돌리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기 위한 달러'라며 차관을 들여와서는, 그 달러를 수입대금으로 쓰지 않고 원화로 바꾸어 회사 운영자금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얘기였다.

같은 금액이라도 국내 은행에서 빌리면 26%라는 높은 금리를 내야 하지만, 차관으로 빌리면 낮은 국제금리만 내면 되기 때문에 당시 그런 편법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 언급에 놀란 언론인이나 기획원 관료는 많지 않았다. 왕초의 현금차관 정책관에 대해 평소 쓰루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들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외자 공급원으로서 현금차관은 나라경제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없었다. 문제는 현금차관이 들어오면서 통화량을 늘리게 된다는 데서 생겨났다. 외환집중제에 의해 모든 외환은 국내에 들어오는 즉시 한국은행에 넣고 그 대금을 원화로 받아야 했다. 외환이 들어오는 만큼 원화를 발행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당시는 미국 원조 당국과 경제기획원 사이에 합의된 재정안정계획이 있어서, 한 해에 한국 정부가 얼마의 예산을 쓸지, 통화량을 얼마나 늘릴지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을 때였다. 이처럼 통화 공급 상한선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수출이나 현금차관 도입 등으로 통화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국내 부문에 공급할 수 있는 통화량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현금차관은 차관을 얻어온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차관과 무관한 (국내 은행에서 돈을 꿔야 하는) 국내 중소기업이나 가계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장안의 신문들은, 추곡 매입자금 방출 등 국내적 요인에 더해 현금차관 유입의 급등 등 해외 요인까지 겹쳐져서 통화량이 너무 늘어났고, 그 결과 재정안정계획의 통화량 상한을 지키기 힘들 것 같다는 전망을 확산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현금차관 때문에 통화량을 더 이상 늘릴 수가 없어 가뜩이나 자금 수요가 많은 연말도 되기 전에 자금 경색이 도래하고, 특히 중소기업 부문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불길한 얘기였다.

10월 말에는 통화량이 663억 원으로 늘어나 재정안정계획의 통화량 상한선인 650억 원을 초과했다는 통계가 공표되었다. 그날로 쓰루는 재무부뿐 아니라 기획원, 한국은행, 국세청 등 전 경제부처를 동원하여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통화량을 포함한 재정안정계획의 전면 검토에 들어갔다.

USOM 처장과 왕초 두 사람 간의 합의로 정하는 재정안정계획을 전면 검토하겠다는 것은 왕초의 거시정책, 특히 통화정책을 검토하겠다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왕초더러 통화정책을 재무장관인 쓰루 자신에게 돌려달라는 공개적인 요구인 것이다.

그러나 큰 몸짓으로 큰소리친 것에 비하면, 10월 28일에 쓰루가 제시한 '재정안정계획 유지를 위한 방안'은 명백한 용두사미였다. 거기에는 그 방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외환 관리가 빠져 있었다. 실망스럽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쓰루는 "남녀의 구별은 기대와 실망을 쉽게 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전제하며, "나는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핵심을 뺀 것"이라는 말로 외환 관련 조치가 곧 취해질 것임을 시사했다.

11월 2일 존슨 대통령의 방한을 수행한 로스토(Rostow) 특별보좌관은 쓰루와의 단독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재정안정계획 유지에 노력해달라"며 통화량 상한을 지켜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은근한 그 압박은 바로 그가 바라는 바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에서 통화량 증가 억제를 기할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은 현금차관 도입 억제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쓰루는 국회에서 '역대 재무장관 중 가장 재치 있는 장관'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국회의원의 질문에 마치 컴퓨터처럼 관련 통계를 재깍재깍 내놓았고, '속사포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국회 발언이 초고속이었다. 1분에 420여 자라는 그의 국회 발언 기록은 윤치영 전 국회의장이 보유하고 있던 1분에 360여 자 기록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11월 8일 국회 재경위 국정감사에서 통화량이 연말 상한을 23억 원이나 초과한 것을 놓고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들고일어났다. 흥분한 의원들은 정부가 앞으로 벌어질 일(금융경색)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통화 팽창을 방치했느냐며 "만약의 경우 김 장관이 물러날 각오를 하고 있느냐"고 쓰루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가 "이것저것 잘못을 전임 김 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눈웃음을 치고 애교를 부리는 바람에 모두가 그만 웃고 말았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당시의 유행가를 연상시키는 그의 조크(?)는 김정렴 전 재무부 장관과 왕초를 싸잡아 지칭하고 있었다. (전임 장관이 한국비료 밀수 사건으로 물러났는데, 한국비료는 대표적인 현금차관 업체였다.)

정치적으로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쓰루는 11월 11일 "내자용 현금차관을 전면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첫째, 차관을 은행이나 정부가 지급보증해주기 때문에 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공장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정의에 명백히 위배'되고, 둘째, 현금차관 때문에 통화가 너무 늘어나 '재정안정계획을 위협'하고 있으며, 셋째, 국내 금리와 해외 금리 간의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 '외국의 악질 자본이 들어와 장난칠 소지가 있다'는 등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