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청빈과 거리가 있던 공자와 맹자

장관 청문회 때마다 '관사테크' 등 추문…옛 선비는 모두 안빈낙도 했을까 공자는 일반 가구의 6배 넘는 집서 거주…적어도 무주택자나 쪽방관 딴판 맹자 연봉은 요즘 돈으로 따지면 몇 백억…임금 하사 36kg의 金 받아 챙겨

2021-05-11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공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니 장관 후보라는 이들을 둘러싼 온갖 구설이 터져 나온다. '논문 내조'니 '관사테크'니 하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이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옛이야기가 있다. '청빈'을 으뜸 미덕으로 치던 조선의 선비들이 떠받들던 공자 맹자도 맑았는지(淸) 모르나 없이 살지는(貧) 않았다.

외려 청부(淸富)라면 모를까. 이건 중국의 칼럼니스트가 쓴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리카이저우 지음, 에쎄)에 나오는 이야기다.

공자의 집은 33묘, 지금으로 치면 2만여 평방미터에 달했다. 집은 비록 방 3칸짜리 15평방미터에 불과했지만 담장은 몇 킬로미터에 달했다는 말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채소와 나무를 심고 가축을 기르는 땅까지 포함해 집의 담장을 둘렀다지만 당시 일반 가구는 대부분 5묘 정도의 크기였다니 공자는 적어도 무주택자거나 쪽방 신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자의 연봉이다. 노나라 출신인 공자는 한때 위나라에 가서 귀족 자제들에게 시서예의를 가르쳤는데 이때 1년에 좁쌀 6만 말, 90톤을 받았다. 이걸 현대 중국의 베이징 슈퍼마켓에서 사려면 약 50만 위안, 우리 돈으로 8,700만 원에 달한다. 당시 물가가 어땠는지 몰라도 요즘 월급쟁이 입장에서 보면 적지 않은 연봉이다.

공자가 31세 때 열국을 주유하기 시작했는데 허난 성 뤄양으로 갈 때, 개인적 방문이었음에도 국고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제쳐 두고 맹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맹자가 가장 잘 나갈 때는 제나라에서 경(卿)의 지위에 있을 때였는데 연봉이 좁쌀 10만 종, 역시 지금 단위로 환산하면 1만 5,000톤에 이르는 엄청난 고액이었다. 우리 돈으로 따지자면 몇 백억 원이 넘으니 상상하기 힘든 지경이다.

그 맹자가 제나라에서 2~3년 근무한 뒤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갈 때 송나라, 설나라 임금이 각각 황금 70일(鎰), 50일을 선사했다. 맹자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받았는데 당시 쓰이던 중량 단위 일(鎰)은 약 300그램이니, 맹자가 받은 금은 모두 3만 6,000그램이다. 36킬로그램의 금덩이! 순도가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보통 현대인은 평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보물' 아닌가.

이랬으니 중국사에서 희대의 간신으로 꼽히는 명나라 가정제 때 탐관오리 엄숭은 장시성에만 6,600채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했고, 그중엔 손자 엄홍, 엄소경 명의의 별장도 있었다는 구절을 읽어도 그리 놀랍지 않다. 한 줌의 권력이 있으면 한 주먹의 특혜를, 한 뼘의 지위가 있으면 한아름의 눈먼 돈을 챙기는 게 권력의 생리라 여겨져서다. 그나마 엄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게 작은 위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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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커리커처.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