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64) '대일 청구권 자금' 난항

한일회담 타결 임박할수록 여론은 악화…"일본 경제 예속"목소리 커 일본과 협상채널 맡아 소통진땀… 대학 찾아가 "어떻게 쓰느냐 중요" '국민에게 영구적 이익 될 수 있도록' 등 청구권 자금활용 5원칙 정해 아들이 "학교 분위기 뒤숭숭"언급하자 "고개 세우고 돈을 꾸냐"한탄

2021-05-25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김학렬

1964년 초 대일청구권자금 협상이 시작되면서 심각한 국가 현안이 되었다.

정치권에서는 부문별 용처를 정부가 임의적으로 배분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야당에서는 여야 모두가 참여하는 청구권자금 운영이어야 함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국회 외무위에 참석한 쓰루는 대일청구권자금 운영관리위원회를 초당적으로 구성하여 청구권자금을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해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이어서 2월 24일 쓰루는 '한일회담 타결되면 일본에 수출사절단을 상주시켜 일체의 계약을 위임', '대일청구권자금 운영위원회 설치하여 장단기 실시계획 마련', '무상 3억 달러 중 7000만 달러는 자본재 도입에 활용', '청구권으로 가져오는 시설재 등을 매각하여 대충자금 계정에 편입' 등을 언급하여 청구권자금 관리 체제가 구체적으로 마련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1966년

1965년에 들어 한일회담 타결과 청구권자금 협상 마무리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쓰루는 더욱 바빠졌다. 우선, 정부가 1965년 2월 그를 한일회담 대표단의 청구권분과위 대표로 임명한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이때부터 쓰루는 일본과 청구권 협의의 채널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협의 채널은 훗날 1969년 8월에 일본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지원을 약속받고, 종합제철소에 대한 일본 정부 측의 자금원을 청구권으로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바빠진 두 번째 이유는 한일 국교 정상화와 청구권자금에 관해 국내에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몇 푼 안 되는 청구권자금을 받으려고 굴욕외교를 펼친다는 것과, 일본 청구권자금의 도입은 한국의 대일 경제적 예속을 가속화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청구권자금에 대한 정부 입장을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고위실무 책임자로 일해온 쓰루밖에 없었다.

1965년 4월 30일 박통을 위시하여 구태회 등 공화당 정책위 의원, 신현확 등 경제과학심의회의 위원, 쓰루 등이 참석한 정부-여당 합동위원회는 '청구권 활용 5원칙'에 합의했다. 첫째, 청구권은 전체 국민에게 영구적 이익이 될 수 있는 각도로 사용한다(즉, 소비해버리지 않는다. 국가 기간시설에 투자한다). 둘째, 관민 공동 관리기구를 설치한다(민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셋째, 투명계획, 투명관리, 투명사용의 원칙을 확립한다(밀실 타협하지 않는다). 넷째, 특별회계제도를 위시한 부수되는 제 입법 조치를 한다(국회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섯째, 일체의 대일교섭에 있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한다(굴욕외교가 아니다)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청구권자금을 일제에 피해를 본 개인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쓰지 않고 산업화 자금으로 쓴 것은 지금까지도 양국 간 외교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 자금으로 일본이 어디까지의 피해를 보상한 것이냐를 둘러싸고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1965년 5월 3일 고려대학교 강당에서 고대총학생회가 주최하는 '한일회담과 한국 경제'라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 중심 의제는 청구권자금이었다. 일본과의 경협은 경제적 예속을 의미한다는 조동필 고려대 교수의 발언은 당시 세태, 특히 식민지 시대에 대한 피해의식과 대외적 패배주의가 팽배한 상아탑의 분위기를 잘 전하고 있었다.

"30억 달러의 미 경제 원조를 받고도 국민의 소비성향만 높아졌지 제대로의 생산시설은 하나도 없다. 청구권은 차라리 받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위치가 아니기에 우리에게 항상 불리하다. 일본의 하청업자적 경제 구조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잘살겠다는 각오에서 새로운 전기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쓰루는 대외경제 협력을 경제 식민주의냐 아니냐의 시각으로 볼 게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슬기롭게 우리가 성장, 발전하는 데에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우리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자학적 태도는 좋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낮다든지, 대학생이 많다든지, 잘살 수 있는 밝은 소지는 많다. 사실 30억 달러가 넘는 미국의 원조로 이만큼이라도 산다. 또한 일부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매판 자본화 내지는 식민지화되지 않을까 하는 소리도 있으나 이는 기우이다. 경제적 격차가 심한 일본과 대만이 경제 협력을 했다 해서 대만이 결코 일본의 매판 자본화가 되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도 매판 자본화를 막을 방도가 있다."

어느 주말 낮이었다. 드물게도 그날은 쓰루가 집에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쓰루의 장자)에게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요즈음 학교 분위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필자가 "뒤숭숭하다"고 전하였다. 이야기가 한일회담으로 간 김에 필자가 늘 궁금해하던 것 하나를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굴욕외교 운운하는데 왜 정부에서 한일회담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호랑이 아비라 하더라도 부자간 대화를 욕으로 끝낼 수는 없었으리라.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역력한 얼굴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돈을 꾸는 놈이 어떻게 고개 빳빳이 세우고 돈을 꾸냐? 너 고개 세우고 당당하게 돈 한번 꿔봐!"라고 씹어내듯 토해냈다. 그것은 국가 현안에 관해 그가 아들과 진지하게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